길에는 아무도 안 보여요, 앨리스가 말했다 - I see nobody on the road, said Alice. <'거울나라의 앨리스' 중에서>
옛날 농담 중에 이런 게 있지요. '없는 것'이 '없는' 가게에 '없는' 것은? 답은 '없는 것'. 철지난 시시한 농담입니다. 이 농담처럼 위의
'앨리스'가 '본 것'은 뭘까요? 네, 'nobody', '아무도 없다'가 되겠지요. 소설 '밀실 · 살인'은 이와 같은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작가 '코바야시 야스미'는 '완구수리자'라는 호러 소설로 수상을 하며 데뷔를 했습니다. 이후 호러는 물론 SF, 미스터리까지 영역을 넓혀
다양한 창작활동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현재 국내에 소개된 소설은 이 '밀실 · 살인'이 유일한 듯 합니다만 일본에서는 이미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이 다시 나오는 후속작도 발표가 된 상태라고 하니 앞으로 작가의 소설을 더 많이 접할 수 있으리라 기대됩니다.
'밀실 · 살인'은 밀실살인이 아닙니다. 밀실과 살인 사이에 점이 하나 찍혀있지요. 그 이유는 피해자가 밀실에 있었으되 시체는 밀실
밖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을 처음 들었을 때는 독자인 저는 물론이고 소설 속의 탐정조차 '대체 그게 무슨 말이야?' 라고
생각했지만 사건의 정황은 이렇습니다. 네 남녀가 별장 2층에 있습니다. 남편과 아내, 남편의 내연녀, 그리고 남편의 변호사. 이혼을 요구하는
남편에게 아내는 거액의 위자료를 청구합니다. 남편은 온갖 괴변을 늘어놓으며 위자료 지급을 거부하고 아내는 그런 남편을 비웃듯
자기 방으로 들어가 문을 걸어잠급니다. 그리고 채 5분이 지나지 않아 아내의 비명소리가 들립니다. 남편은 얼른 아내의 방문을 두드리지만
문은 굳게 잠겨 있습니다. 변호사가 옆 방의 창문을 통해 방 안의 상황을 살펴보자고 제안하고 두 사람은 창고로 쓰는 옆 방의 문을
열려고 하나 역시나 잠겨 있습니다. 그 다음 방인 자신의 방에 들어가 창문 너머 아내의 방을 보려던 남편은 창문 아래에서 눈밭에
널부러진 아내의 시체를 보게 됩니다. 남편은 변호사와 함께 아내에게 달려내려가고 내연녀는 어쩔 줄 몰라 가만히 있습니다. 1층으로
내려가니 역시나 아내는 죽은 게 확실합니다. 얼어붙은 얕은 호수를 깨고 얼음물에 반쯤 잠겨있는 그녀의 시체는 남편을 원망하는 것만
같습니다. 2층으로 돌아온 남편과 변호사는 닫힌 아내의 방문을 부수어 엽니다. 그리고 그들의 눈에 단단히 잠긴 창문이 들어옵니다.
아내는 자살했을까요? 그렇다면 창문으로 뛰어내려 죽은 뒤 다시 창문을 잠궈야만 합니다. 살해되었을까요? 그렇다면 범인은 어디로
나갔을까요? 창문? 안 쪽에서만 잠기는 방식이라 열고 밖으로 나갔다면 잠그는 게 불가능합니다. 문? 밖에는 목격자가 있습니다. 비밀문?
그런 건 애초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사고? 대체 어떤 사고가 밀실 안의 피해자를 창 밖으로 내던질 수 있겠습니까. 밀실이 존재하고
죽은 사람이 존재하나 밀실 안에는 죽은 사람이 없습니다. 그것이 '밀실 · 살인'입니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요?
책을 읽으면 진상을 알 수 있습니다. 작가 소개에서 다양한 장르를 섭렵하고 있다 말했는데 이 소설에도 그 특징이 여실히 묻어납니다.
처음에는 단순히 밀실을 소재로 한 미스터리 같은 전개를 보이다가 느닷없이 영산에 봉인되었던 마물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별장 근처의
마을에 사는 노인은 별장이 신사를 허물고 세운 것이며 허물어진 신사는 본디 마물을 봉하고 있었다는 말을 합니다. 탐정 조수 '요츠야 레이코'는
그 말에 코웃음을 치지만 피해자의 남편 '니시다 타츠히코'의 서재에서 발견된 신사의 기원을 그려놓은 고문서에는 세 남녀의 치정극과
그 와중에 죽은 여인, 그리고 죽은 여인에게 빙의하는 기괴한 신의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마치 방금 벌어진 사건처럼 말이지요.
남편과 내연녀, 그리고 아내 세 사람의 치정극과 아내의 죽음. 그렇다면 아내는 봉인이 풀린 마물에 씌여 귀신이 되는 걸까요? 중반의
이러한 호러블한 분위기는 마지막에 다시 한 번 변모합니다. 탐정이 등장하여 사건의 진상을 논리적으로 설명해내는 것이지요. 하지만
일반적인 추리소설의 해결부분과는 다릅니다. 탐정 조수가 지닌 과거의 트라우마, 그리고 그녀만이 볼 수 있는 'nobody'. 소설은 마지막에
또 다시 굳어지려는 자신의 장르를 탈피하고 뱀처럼 스물스물 기어 사라집니다. 이러한 다각적인 변모는 꽤 신선한 재미를 제공합니다.
사실 호러와 미스터리의 조합은 아주 흔한 편인데 거기에 주인공의 심리까지 더해져서 그간의 호러 미스터리보다 더욱 색다른 모습을
보입니다. 트릭 또한 알고 보면 시시하고 경찰이 놓치지 않을 법한 증거가 남을 듯도 하지만 그래도 꽤 설득력이 있습니다. 밀실과
시체가 다른 장소에 있다는 점 또한 빼놓지 말아야 할 창의력이라 여겨집니다.
다만, 역시나 아쉬운 것은 장르의 변화에 주어진 밸런스입니다. 미스터리와 호러의 밸런스가 그닥 좋지 않습니다. 본격 밀실추리로
시작하는 소설은 조수 '요츠야'와 탐정의 만담 같은 가벼운 분위기였다가 뜬금없이 호러의 영역이 침범합니다. 허나 이 호러는 제 자리를
꽉 잡지 못하고 다시 추리에 자리를 비켜준 뒤 가끔 남편 '타츠히코'의 기행에 살짝 모습을 비추다가 다시 사라지고는 합니다. 그러나
'타츠히코'의 기행이래봐야 아무리봐도 호러가 아닌 히스테리의 영역 정도에 머물러 별로 무섭지 않습니다. 주인공의 트라우마 역시
호러의 부분에 접점이 있어 일부러 분량을 조절한 듯 싶지만 결국 미스터리에 호러라는 향신료를 약간 친 정도에서 머물었다는 인상이
남습니다. 마지막에 알게 되는 주인공의 트라우마의 정체 역시 조금 비중이 적은 감이 있습니다. 좀 더 분량을 들여 설명했다면 한층
효과가 컸지 않나,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다양한 장르의 결합으로 시종일관 신선함을 제공하려는 소설 '밀실 · 살인'. 하지만 세 가지 맛이 절묘하게 섞인 아이스크림이 아니라
단지 초콜렛과 아몬드를 적당히 송송 박아놓은 바닐라 맛이라는 느낌이 더욱 강하다는 점에서 재미있고 참신할 뻔 했으나 결국 약간
평범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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