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벽 -미국

트루먼 카포티, 라고 하면 아는 거라고는 오직 '티파니에서 아침을' 뿐이다. 명랑 발랄한 오드리 햅번 뿐만 아니라 심각한 오드리 역시 너무너무 예쁘다는 진리를 깨닫게 해준 영화의 원작자,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사실 '인 콜드 블러드'도 읽기는 했지만 그래도 거긴 오드리가 안나오니까. 영화 '카포티'를 본 뒤로 이 사람에 대한 흥미가 잠시 생겼다가 금방 사라졌다. 딱히 도서관에 들여온 그의 책이 없었기 때문이겠다. 가난의 최첨단을 달리는 인생을 줄곧 영유하고 있는 학생 찌끄러기(...)에게 점점점점점점 비싸지는 책은 그저 한숨만 나올 뿐이다. 뉴스를 보니 10년간 물가가 내린 적이 없다고 하던데 책값은 내가 알기로는 25년간 내린 적이 없다. 과자값도 그렇고. 아이스크림도. 아니, 대체 25년 동안 값이 내린 게 있기는 하.... 컴퓨터 부품 값은 확실히 내렸다. XT120만원일 때 샀었던 기억이 생생하니까. 하지만 컴퓨터보다는 책 값이 내렸으면 좋겠다. 나도 여유롭게 매주 한번쯤 서점에 가서 느긋한 마음으로 책을 두세권씩 살 수 있었으면 바랄 나위가 없겠다. 가뭄에 콩 난듯 서점에 가도 책의 가격만 보면 위장이 꼬일 정도로 고통스럽다. 한때나마 나의 성역은 이미 자본주의의 전장이나 다름이 없다. 슬프다. '차가운 벽'은 카포티의 단편 소설 모음집이다. 난 단편 소설을 좋아하지 않는데 왜 읽었나면 단편 소설인 줄 몰랐기 때문이다... 나 바보? , 카포티군. 한번쯤 읽고 싶었어. 라는 생각만으로 책장에서 뽑아오다보니 확인을 못했었다. 허나 전혀 문제없다. 책이 재밌었으니까. 초반의 몇몇 글은 에? 어디서 많이 본듯한 느낌이네, 란 감각을 지울 수가 없다. 달리 말하자면 여기저기서 읽을 수 있는 흔한 느낌의 글인 셈이다. 허나 후반부로 가면 작가 특유의 테이스트를 느낄 수 있게 된다. 물론 초반에도 몇개를 빼면 충분히 특색있지만. 허나 이 작가 특유, 는 한 단어로 정의 내리기가 힘들다. 퇴폐? 라고 할 수도 없고 몽환? 이라고 할 수도 없다. 현실에 대한 시선은 차갑고 사태에 대한 태도는 냉정하다. 허나 그게 다가 아니라고 느끼게 하는 점이 분명히 존재한다. 이는 인간애에서 오는 것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감히 진단내리기는 껄끄럽다.


영화 '카포티'에 대해 감상문을 쓴 적이 있다. 일종의 과제물이었는데 내가 처음 여자에게 고백했던 일에 대해 적었었다. 난 고백을 했고 그 아이는 고백을 받아들였었다. 그리고 그 순간 내 감정은 소멸했다. 풋풋하다면 민망하고 멍청하다면 수긍이 가는 중학생 시절의 이야기이다. 내가 비록 살면서 부끄러운 짓을 하도 저지르고 다녀 과거의 추태가 드러나는 일에 그닥 거부감이 없기는 하지만 이렇게 대놓고 민망한 사건을 끄적여서 교수님께 제출하도록 만든 것은 영화의 힘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미친 짓이었지. 허나 딱히 지금이라고 그 때보다 성장한 건 아니... '차가운 벽'을 읽고 나니 또 어딘가에서 멍청한 짓을 저질러 버릴 것 같은 감각에 휩싸였다. 무섭다. 허나 지금은 친구도 없고 아는 사람도 없어 멍청하고 민망한 짓을 해 보일 주위 사람이 아예 없다. 다행이다. 다행이다? 슬퍼졌다. 카포티는 독특한 사람이지만 난 사실 작가라는 인종에게는 관심이 없다. 펴스널리티를 따져가며 읽을만치 난 성의있는 독자가 아니며 자신의 퍼스널리티를 알아야 책에서 뭔가를 찾아낼 수 있는 작가라면 가치 따윈 없는 거나 마찬가지이다. 사실 이게 나다! 라고 내밀 수 있는 자아 따윌 가진 인간이 몇이나 되겠어. '난 이런 사람이야!' 라고 말하고 다니는 사람만큼 믿기 힘든 인종도 또 없다. 그러나 난 멍청한 사람... 다만 그의 글은 색다른 매력이 있고 그 점은 무척 마음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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