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는 시체의 죽음 -일본


'살아있는 시체의 죽음'은 야마구치 마사야의 89년도 작품입니다. 제게는 상당히 생소한 작가입니다만,

일본에서는 제법 유명한 모양으로 과거 98년도에 실시한 '10년간 뽑은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에서 1위를,

08년도의 '더욱 대단하다!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에서도 2위를 차지했다고 합니다. 여담입니다만 98년도의 2위는 미야베 미유키의

'화차'이고 08년도의 1위 역시 '화차'였다고 합니다. 신용카드의 무서움은 20년의 세월을 뛰어넘는구나...

그치만 전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상 받은 작품들을 그다지 재밌게 보질 않아서... '니들 눈에는 대단하구나 상'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기에 별 감흥은 없습니다.

그런 느낌으로 책을 읽긴 했는데 읽고보니 꽤 재밌어요! 물론 시대차가 약간 있는 관계로 최근 경향과는 다르게 초반의 전개가 상당히

느긋하고 해결을 향해 열심히 빙 에둘러가는 경향이 있는데 전 이런 걸 더 좋아하는 편이라 아주 매력적이었습니다. 요즘 추리소설들은

사람이 너무 금방 죽고 해결에 너무 일직선으로 달려가는 것 같아서 여유로움이 안 느껴져요. 뭐, 사람이 죽었는데 여유를 부리는 건

긴다이치 탐정 정도 밖에 없겠지만 말이죠.

제목에서 나타나듯 이 소설은 시체가 살아납니다. 시체 살아나는 건 요즘 감각으로는 낡은 편에 속하는 소재지요. 좀비가 아주 판을 치는 와중이니.

그러나 이 소설의 살아난 시체는 그 궤를 달리합니다. 이성이 제대로 박혀있고 단지 몸만 꼴깍 죽었을 뿐인 거지요. 이러한 설정은

얼핏 생각하기에도 당대의 상황과 살짝 연계시킬 수 있을 것도 같습니다. '나는 전설이다'에서 공산주의나 매카시즘을 읽을 수 있는 것 처럼요.
 
그렇지만 그건 머리 좋은 사람들이 잘난 척할때나 하는 짓이고 이 소설은 그런 외부적 해석 없이 순수한 추리물로서만으로도 아주 재밌답니다.

그리고 이러한 설정, 큰 뿌리의 경우 실력없는 작가들이라면 쉽게 설정에 찰싹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고 그곳에서 흐르는 수액을 빨아먹느라

정신이 나갔을 법도 한데 이 소설에서는 설정에 맞춘 유연한 전개가 아주 훌륭하게 흘러갑니다. 예컨데 저는 라이트노벨에 대해 아주 긍정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지만 가끔... 아니, 사실은 많은 라이트노벨들이 초반 정립된 설정에 온 몸을 기댄채 그저 해프닝성 전개를 남발하는 경향이 짙어서

잘 읽지는 않습니다. 이 시체가 살아난다는 설정 역시 자칫하다간 이 시체가 살아난 뒤 이벤트가 생기고 그걸 대충 수습하고 나니 딴 시체가 살아나서

또 다시 비슷한 느낌으로 수습, 그리고 반복이라는 악수를 택할 뻔도 했는데 그런 우를 범하지 않지요. 그것만으로도 높은 점수를 받기에 충분합니다.

고로, 이 소설은 독특하고 강한 설정에서 자극적인 맛을 느낄 수 있으되 본격 추리소설로서의 틀이 잘 잡혀 질리지 않고 만족을 느끼게 한다, 고 할 수 있지요.

소설은 미국의 툼스빌이라는 가상의 마을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일본 작가인데 배경도, 등장인물들도 다 영미계통이지요.

시체가 다시 살아난다는 기묘한 현상이 전세계적으로 발생하는 와중에 주인공은 친가인 툼스빌을 방문하고 그곳에서 죽습니다.

그리고 어느새 슬그머니 되살아나서 자신의 주위에서 펼쳐지는 살인사건들의 진상을 파헤쳐나가지요.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부조리한 상황에서 사람을 죽이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라는 모순 속에서도 계속되는 살인은 나름대로 느긋하고 주위를 전부

신경쓰는 전개임에도 불구하고 흥미가 넘칩니다.

칭찬만 잔뜩 쓴 기분이지만 허점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느린 전개를 전 좋아한다고 계속 강조한 기분도 들지만 말을 바꾸면 꽉 짜여져

빈틈없는 이야기는 아니라는 말로도 사실 치환가능합니다. 캐릭터들이 활기차게 여기저기서 움직이기는 합니다만 매력적이냐고 물으신다면 글쎄요..

다들 정형화된 인물들이라 펑크족 시체 탐정이라는 전무후무의 포지션을 취하는 주인공임에도 불구하고 평범하네.. 란 느낌마저 들 정도지요.

다른 인물들 역시 마찬가지고요. 그리고 소재 중 몇가지는 잘 다듬어지지 않아 이야기 과정 중 약간씩 삐져나오는 느낌을 받기도 합니다.

이는 역시나 천천히 진행되는 전개 때문이기도 하지요.

허나 단점은 적고 장점은 많은 소설입니다. 독특한 추리소설을 읽고 싶다면 주저없이 추천할 수 있는 그런 책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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