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세레레 -유럽



'미세레레'는 국내에 작품이 제법 많이 소개된 인기 작가 '장 크리스토프 그랑제'의 소설입니다. 저도 작가의 다른 작품인 '돌의 집회'와

'검은 선'을 읽은 적이 있고 '장 르노'와 '뱅상 카셀'이 나온 '크림슨 리버'는 영화로 봤습니다. 동명의 원작 소설을 그랑제가 썼지요.

뱅상 카셀은 언제봐도 참 멋지지만 영화 자체는 꽤나 미묘했지요... 사실 돌의 집회나 검은 선도 재밌게 읽었지만 뒤에 생각해보니 그것도

좀 미묘... 굉장한 것 같은데 곰곰히 생각하면 또 안 굉장한 것 같기도 한 그런 느낌... 덕분에 제 안에서의 그랑제에 대한 선호도는 더없이

미묘한 수준입니다. 도서관에 있으면 읽고 없어도 아쉬울 건 없고. 하지만 미세레레는 상당히 괜찮더군요. 물론 여전히 미묘한 맛은

남아있지만요.


은퇴한 노형사 '리오넬 카스단'이 매주 다니는 아르메니안 성당에서 오르간 반주자가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마침 성당에 들른

참이던 카스단은 은퇴했음에도 곧장 사건현장을 살피고 자신의 안방이나 다름없는 성당에서 살인이 난 것에 분노합니다. 살해당한 인물은

'빌헬름 괴츠'로 칠레에서 망명을 해온 사람이었습니다. 귓속이 날카로운 바늘같은 것에 뚫려 엄청난 고통 끝에 심장마비로 사망한 괴츠는

조용하고 점잖은 인물로 알려져 있었으나 조사를 할 수록 비밀이 드러나는 인물이었습니다. 은퇴한 몸이라 수사에 참여할 수가 없지만

그저 보고 있을 수만도 없던 카스단은 독자적으로 범인을 쫓고 그 와중에 수사팀 외에도 자신처럼 홀로 사건을 파헤치는 다른 형사가

있음을 알게 됩니다. 현재 마약 중독자 재활원에 들어가 있는 형사 '세드릭 볼로킨'이 바로 그 사람이었습니다. 아이들과 유난히 쉽게

친해지는 볼로킨은 괴츠 사건에 아이들이 관여해 있다는 직감으로 이번 사건에 뛰어들었으며 카스단은 이내 이 인물이 자신에게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게됩니다. 은퇴한 노형사와 중독자인 젊은 형사는 삐걱대면서도 손을 맞잡고 괴츠의 사건을 해결하려 합니다. 허나 괴츠의

애인인 '나세르'도 괴츠와 동일한 수법으로 살해당하고 이에 더해 혀까지 잘려나가는 일이 벌어집니다. 잘린 혀는 붓처럼 사용되어 미세레레의

가사 일부를 피글씨로 적어놓는 엽기적인 행각까지 더해진 것이지요. 괴츠는 단순히 칠레 망명자가 아니라 '살바도르 아옌데'와 독재자

'피노체트' 간의 정치적 사건에 연루된 인물에다 그의 집에는 도청기가 설치되어 있었으며 소년 성가대의 지휘자이기도 했던 것이 밝혀집니다.

정치적인 이유로 살해되었을 가능성, 괴츠가 소아성애자였고 아이들의 복수에 의해 죽었을 가능성 등 괴츠의 죽음은 미궁에 빠지고 사건을

증언한 사람들마저 하나 둘 살해당하며 깊은 음모가 자리잡고 있음을 알립니다. 카스단과 볼로킨은 이 사건을 해결하고 그 뒤에 숨겨진

거대한 비밀을 풀어낼 수 있을까요?


미세레레는 성경의 시편 제50편 - 판형에 따라서는 제51편 - miserere mei Deus(미제레레 메이 데우스 -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의

첫머리로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의미입니다. 사실 '미제레레'에 더 가까운 발음이지만 책에서 '미세레레'로 해놨으니 따르겠습니다.

다윗왕이 - 다윗과 골리앗의 그 다윗 - 밧세바를 범하고 자신의 죄를 하느님께 고하는 시편 제50편의 기도를 기초로 작곡한 곡입니다.

밧세바는 다윗의 군대 장교 우리야의 아내였는데 어느날 밧세바가 목욕하는 모습을 훔쳐본 다윗왕이 그녀를 취하기 위해 우리야를 일부러

사지로 몰아넣어 죽이지요. 그 뒤 밧세바를 아내로 취하지만 그 죄로 인해 그녀와의 사이에 얻은 첫 아들이 죽고 두 번째 아들이 그 유명한

솔로몬입니다. 음, 어디에나 있을 법한 구질구질한 추문이군요. 아무튼 미세레레는 오랫동안 시스티나 성당의 성 금요일 예배에서만

불려왔으며 반출이 금지되었던 곡입니다. 모짜르트가 단 한 번 듣고 악보를 외워버린 유명한 일화의 노래가 바로 이 곡이기도 합니다.

제가 읽은 모짜르트 평전에서 이 곡을 듣고 외워 악보로 옮겨적었다가 들켜서 사형당할 위기에 처했는데 사제가 웃으며 신이 주신 재능이니

죽여서는 안 된다고 말했던 것 같은 기억이 있는데 애초에 악보 같은 것 때문에 사람 죽이지 좀 말라고요... 하긴 그 당시에는 별별 이유로

하도 사람을 잘 죽였으니 이해를 못 할 것도 아닙니다만.

미세레레는 그랑제의 소설 특유의 흐름을 잘 따라갑니다. 엽기적인 살인, 의문의 흉기, 그 뒤에 숨겨진 비밀, 비밀을 파냈더니 더 큰 비밀,

그 비밀에 얽힌 주인공들의 과거 같이 말이지요. 전형적이지만 너무나도 흡입력이 있습니다. 성가대의 음악과 칠레의 역사라는 이질적인

소재를 외떨어지게 하는 척하며 절묘하게 묶어놓았고 두 형사의 조형도 매력적으로 이루었습니다. 살인이 주는 긴장감과 함께 범인에

대한 두려움도 멋지게 표현해 정말 끌리는 소설을 완성했지요. 역시나 호불호가 갈릴 부분은 이전의 그랑제 소설과 마찬가지로 결말의

부분입니다. 보기에 따라 현실적이고 이 이상 없을 설득력있는 결말이지만 달리 보면 닭 쫓던 개 꼴 난 두 주인공이기도 하거든요. 전작들도

결말 부분이 흐엉 좀 미묘하다... 라는 인상이었는데 이번에도 비슷합니다. 마지막의 마지막에 이게 뭐야! 라고 외치게 될 소설이 딱 질색인

분들께는 권하기가 망설여지네요. 하지만 속도감 있고 미스터리어스하며 잔인한 분위기에 역사적인 문제까지 끌어들이는 작가의 솜씨는

정말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제까지의 그랑제 소설 중 가장 괜찮았던 것 같아요.



마지막으로 작가가 이 작품을 쓸 때 들었다는 킹스칼리지 버전 미세레레를 올립니다. 듣고 있으니 불안해... 성가는 상투스같은 것만
 
들었었는데 이런 분위기도 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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