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이블 위의 카드 -유럽


마포평생학습관이 11일까지, 서대문도서관이 15일까지 종합자료실을 운영하지 않아 저의 독서 생활에도 큰 타격이 왔습니다. 학교

도서관은 연체가 심해서 이용할 수가 없고... 이건 자업자득이지만! 그런 의미에서 며칠 간 집에 있는 책들을 다시 한 번 읽고 있습니다.

내일부터는 다시 책을 빌릴 수 있다니 정말 기쁘지만 예전에 읽었던 책을 다시 읽는 것 또한 아주 즐거운 경험이었습니다. 산 책들이

전부 재미있어서 '나 이렇게까지 안목이 뛰어났나?' 싶어서 뿌듯하기도 하고. 헤헤. '테이블 위의 카드'는 부산에서 가져온 유일한

크리스티 여사님의 소설입니다. 집에 해문출판사의 애거서 크리스티 시리즈가 많았는데 빌려주고 분실하고 이사를 몇 차례씩 하다보니

하나하나 사라졌습니다. 아까워라... '예고살인' 같은 건 표지가 어릴 때 트라우마로 남아서 없어진 게 아쉽진 않지만 '쥐 덫'이나

'오리엔탈 특급 살인사건'은 너무 아깝습니다. 열 권도 넘었던 거 같은데 사라지다니 참... '은하영웅전설'도 없어졌지만 그건 어머니께서

그냥 버린 거라서 딱히 뭐라 할 말은 없고... 뭐, 이사할 때 버려지는 일 순위가 책이긴 하지요. 하지만 테이블 위의 카드만큼은 제가

눈에 불을 켜고 지켜왔고 어느새 서울 생활까지도 함께 하고 있는 인생의 동반자입니다. ...책보단 여성과 인생을 동반하고 싶지만.


'셰이터나'는 어딘지 모르게 사악함이 느껴지는 인물입니다. 그는 아주 뛰어난 안목의 수집가이자 파티광으로 사교계에서 유명한

인물이지요. 셰이터나는 어느날 '포와로'와 만나 포와로의 직업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는 포와로에게 살인을 저지르고도 잡히지 않은

인간은 이미 그 자체로 예술품이며 자신은 그런 예술품을 몇 점 정도 알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그 예술품을 포와로 앞에

선보이겠다며 포와로를 자신의 집에 초대하지요. 초대받은 인물은 포와로 만이 아니었습니다. 경찰인 '배틀' 경감, 첩보부 출신인

'레이스' 대령, 그리고 추리소설 작가 '아리아드네 올리버' 부인. 이 네 명에 더해 의사 '로버츠', 브릿지 게임광인 노부인 '로리머',

탐험가 '디스파드' 소령, 내성적인 아가씨 '메리디스'가 셰이터나의 초대를 받아 그의 집에 찾아왔습니다. 셰이터나는 배틀과 레이스,

- 배틀과 레이스라고 적으니 꼭 스타크래프트 같지만 - 올리버 부인과 포와로를 모아 브릿지 게임을 하게 하고 나머지 넷은 다른 방에

모아 브릿지 게임을 하도록 합니다. 그리고 자신은 로버츠, 로리머, 디스파드 그리고 메리디스의 게임을 조용히 지켜보지요. 밤이 깊어

파티를 끝낼 때가 되었는데도 셰이터나는 앉은 채 미동도 하지 않습니다. 잠이 들었나 싶어 그를 살펴보니 가슴에 단검이 깊이 꽂혀

죽어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지요. 단검은 너무나 날카로워서 가녀린 여인조차 버터를 찌르듯 살을 푹 찔러넣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각 방을 오갔던 인물이 없는 이상 용의자는 넷으로 한정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셰이터나가 수집한 완전범죄를 성공한

살인자들이었지요. 과연 누가 범인인가? 너무도 대범하고 순식간에 벌어진 범죄라 증거가 지극히 미약한 상태에서 포와로는 이상하게도

범인을 찾는 대신 용의자들 사이의 브릿지 게임 과정에만 관심을 가집니다. 대담하고 이미 완전범죄를 성공시켰었던 범인을 과연 포와로는

찾아낼 수 있을까요?


이 소설을 제가 굉장히 좋아하는 이유는 포와로가 너무나 포와로답게 나온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이 소설에서 포와로는 뻔뻔하게도

이렇게 말합니다. '문제는, 에르큘 포와로가 틀릴 수 있느냐 하는 겁니다.' 다른 인물이 '언제나 옳은 사람은 없어요.'라고 대답하지만

포와로는 거침없이 말하지요. '아닙니다. 나는 언제나 옳습니다.' 그렇습니다, 포와로님은 언제나 옳으신 분이십니다! 자기도 이상하다고

생각하긴 하는데 그런데 언제나 옳으니 어쩔 수가 없다고 말하는 탐정이 바로 포와로입니다. 아이고, 세상에! 역대 어떤 탐정이 저런

말을 할 수 있었나 싶지만 포와로는 가능하지요. 진짜로 언제나 옳으니까! 그에 더해 지금이야 흔한 방식이긴 하지만 네 명의 용의자에

대하여 현재의 범죄 뿐만 아니라 각자의 과거까지 파헤치는 전개에 더해 세련되게도 그 방식을 모든 용의자에 적용시키는 것이 아니라

단 몇 줄의 단어로 그렇게 뒤를 캐지 않아도 독자가 수긍할 수 있게 장치까지 마련한 센스는 감탄을 자아냅니다. 정말이지 크리스티

여사님은 대단한 작가라 아니 할 수가 없어요. 평범하게 용의자들을 심문하는 것만이 아니라 과거를 파헤치고 그것에 그치지 않고

역동성을 잃지 않기 위해 사건을 연속시키며 마지막까지 반전을 시도하는 자세는 추리소설이 가져야 할 미덕이 이 소설 단 한 권에

모두 모여있다고 말해도 관언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트릭과 전개가 뛰어난 것도 모자라 캐릭터까지도 아주 매력적입니다.

포와로야 말이 필요없는 매력덩어리이지만 희극적인 추리작가 아리아드네 올리버 부인 역시 아주 매력적입니다. 여성 추리작가라는 점은

캐릭터를 창조한 크리스티 여사도 마찬가지인데 이 부인을 대단히 유쾌한 인물로 조형했다는 점이 대단합니다. 이 캐릭터는 서슴없이

'생각하는 것보다 글을 쓰는 게 더 귀찮다'라고 하거나 '6천자를 쓴 줄 알았는데 3천자 밖에 안 되는 걸 알고 살인을 한 건 더 발생시켰다'라고

말하기까지 합니다. 그녀를 동경해 집까지 찾아온 '로다'는 이 말을 듣고 '올리버 부인에 대한 열정이 조금 줄어들었다'고 느끼기도

하지요. 즐겁고 멋진 등장인물들, 놀라운 도입부, 지루하지 않게 여기저기 손을 쓴 전개, 대범한 범죄에 계속 이어지는 반전. 테이블

위의 카드는 추리소설 팬이라면 놓쳐서는 안 될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담이지만 해문출판사 애거서 크리스티 미스터리 시리즈의 뒷표지에는 크리스티 여사의 초상화가 있는데 제 외숙모님과 굉장히

닮았습니다. 그래서 전 어릴 때부터 숙모를 '여사님'이라고 불렀는데 어느새 친척들 전부 숙모를 여사님이라고 부르더군요. 숙모는

아마도 평생 '여사님'의 진실을 알지 못하시겠지만 본인도 딱히 싫어하는 거 같지는 않으니 상관없...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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