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너미 오브 갓 -유럽


'버나드 콘웰'의 군벌 아서 이야기 그 두 번째 작품인 '에너미 오브 갓'을 다 읽었습니다. 제목이 무려 '신의 적'이군요. 신이라니

적으로 돌리기 가장 좋지 않은 존재가 아닐까 싶습니다만. 생각해보면 요즘같은 세상을 살면서 '적'이라고 부를만한 존재를 찾기도

그리 쉬운 일은 아니지요. 우리의 주적이 북한이라지만 일상에서는 굳이 북한을 생각하며 살 일이 없으니 적으로 증오하느냐? 하면

아뇨, 그렇다기보단 신경쓰지 않는다는 쪽에 가깝겠지요. 그건 안중에 없다는 것이지 적으로 여긴다는 것과는 거리가 좀 있지 않나, 싶네요.

제 그닥 길지 않지만 이제는 더 이상 짧다고도 부를 수 없는 생애에서 가장 증오하고 적이라 부를 법한 인간이라면 딱 한 명 정도를

꼽을 수 있겠네요. 그 사람은 초등학교 때 절 개패듯 팬 선생이 아니고, 중학교 때 절 개패듯 팬 선생도 아니라 바로 군대에서 제 바로

윗 선임이었던 자입니다. 고등학교 다닐 땐 맞은 적이 없는데 초등, 중학생 때는 왜 그리 많이 맞고 다녔는지 잘 모르겠네요. 다른

친구들도 다 같이 맞아서 맞는 것에 딱히 의문을 가진 적이 없는데 사실 그걸 이상하게 여겼어야 했는데 말이지요. 반 아이들 중 안

맞은 사람이 없다는 건 이미 학생 개개인의 잘못에 대한 처벌의 영역을 넘었다는 것인데... 뭐, 어렸으니까요. 아무튼, 이제는 그 선생들도

그런 식의 교육을 못하겠지요. 못하겠지요...? 아무튼 제 군대 선임은 참으로 증오를 불러일으키는 인간이었던지라 확 한 대 갈기고

군생활을 좀 더 할까 진지하게 고민까지 했었습니다. 그 인간을 최악으로 만든 것은 바로 자신의 내면은 대단히 아름답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는 점인데요, 후임들을 신나게 갈구고 괴롭힌 뒤 자신이 이렇게 못되게 군 것은 못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필요해서였고

자신의 내면은 이와 반대로 아주 아름답기에 그 내면의 빛이 외형으로도 표출될 것이 분명하며 그렇기에 자신이 아무리 후임들을

괴롭혀도 자기 내면에서 나오는 빛이 보이지 않을리가 없기에 자신을 미워할 리가 없고 사랑할 게 틀림없으며 그렇기에 자신의 괴롭힘은

정당하다는 그 인간 내부에서 회오리치는 혐오스러운 합리화의 개미지옥이 눈에 훤히 보인다는 점이었습니다. 뭔 소리냐면 자기가 하는
 
일은 전부 옳고 - 옳지 않았지만 - 그걸 모두가 알리라 확신했다는 점이지요. 옳지 않았기 때문에 당연히 아무도 몰랐지만. 아, 남을

욕하는 일은 왜 이리 신나는 것일까요? 에너미 오브 갓의 독후감 대신 그 인간의 욕으로 이 포스팅을 가득 채우고 싶어지네요.


전작 '윈터 킹'에서 '러그 계곡의 대전투'를 승리로 이끈 '아서'는 '모드레드'의 왕위를 지키고 브리튼 남부의 동맹을 이루어냅니다.

그 자신은 모드레드의 왕권을 대행하며 브리튼 남부의 절대적인 지도자로 군림하지요. 그는 이 동맹이 색슨을 물리치고 안정을 가져오리라

확신합니다. 허나 마법사 '멀린'은 인간의 힘으로는 브리튼의 평화를 완성할 수 없고 오직 신들만이 가능하다 믿습니다. 그는 자신의

연인이자 제자인 '니무에'와 함께 브리튼의 열세 가지 보물들을 모으며 신들을 다시 강림시키려 하고 이 이야기의 화자이자 주인공

'데르벨'을 데리고 보물 중 가장 큰 힘을 지닌 '솥'을 얻기 위해 어둠의 땅 '다크로드'로 떠납니다. 데르벨과 멀린이 솥을 얻기 위한

모험을 떠난 동안 아서는 동맹을 굳건히 하고 '둠노니아'의 안정을 위해 동분서주하지만 이미 갈등의 전조는 내부에 깊게 뿌리내리고

있었습니다. 정당한 세금을 교회에 요구한 아서는 기독교 신의 적 취급을 받고 그의 아내 '귀니비어'는 여신 '이시스'의 신앙에 지나치게

심취했으며 멀린 이상의 광신도 니무에도 자신의 신앙을 휘두릅니다. 안 그래도 밖으로는 색슨, 안으로는 브리튼의 내분으로 박터지게

싸우고 있는데 종교들 간의 갈등은 극단으로 치닫고 결국 아서의 입장에서는 최악의 사건이 벌어지며 불안한 평화는 완전히 박살이

나고 맙니다.


에너미 오브 갓은 윈터 킹에 이어 여전히 멋지고 흥미진진한 전개를 보여주었습니다. 전작에서 비중은 적었으나 충분히 위험한 도화선으로

보였던 신앙의 문제가 이번 편에서 대폭발을 일으켰으며 아서 왕의 이야기를 조금이라도 접했다면 다들 아는 귀니비어와 '란슬롯'의

사건도 파괴력있는 모습으로 등장했습니다. 그것만으로도 대만족인데 '트리스탄'과 '이졸데' - 이 작품에서는 '이쥘트'로 나옵니다. -

의 이야기까지 매력적인 비극으로 등장하여 마치 받은 선물을 까보는 와중에 다른 선물을 받고, 그걸 까보는 와중에 다른 선물을 또

다시 받는 기분이랄까요. 물론 아서 왕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이 보더라도 거친 매력이 넘치는 매혹적인 작품이긴 하지만요.

이 소설은 얼핏 '아서 왕 연대기'의 이름을 달고 줄창 화자인 데르벨의 이야기만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작가의 노련함은

아서의 곁에 찰싹 붙어서 혀로 핥듯이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묘사하는 것 이상으로 아서의 움직임과 생각을 짙게 드러내는데 성공했습니다.

게다가 데르벨 또한 아주 멋진 인물인지라 그의 활약 역시 읽는 재미가 쏠쏠하지요. 이 소설은 그렇기에 재해석된 아서 왕의 이야기로도

성공적이며 근사한 전쟁 소설이기도 하고 멋진 영웅담이기도 하며 재미있는 성장 소설이기도 합니다. 이에 더해 이번 편에 와서 로맨스도

폭발하여 사랑이 넘치는 연애 소설의 자리 또한 차지했습니다. 뭐, 그 연애가 성공하기도 하고 실패하기도 하지만. 실패하는 경우가

더 많긴 하지만. 그리고 이 소설에서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의 장점은 마법의 힘을 과소평가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경우에 따라

마치 미신이나 속임수의 위치에 마법을 놓기도 하지만 결코 우습게 여기거나 무의미한 것으로 취급하지 않고 작중 커다란 힘으로

작용하는 모습을 종종 보여 리얼리즘이라는 이름의 함정에 빠져 이야기의 광채를 바래는 실수를 하지 않는 점이 대단히 훌륭합니다.

그나저나, 바른 길을 걷는 아서를 적으로 치부하며 싸움을 거는 자들에게도 각자의 이유 또는 시대의 명분이 있었다는 걸 생각해보면

제 선임 역시 군대라는 특수한 환경에 맞춰 적당한 타락으로 자신의 안위를 추구한 평범한 인간일 뿐이니 저도 아서처럼 용서를 해야

할 것인데... 아, 아냐. 그 인간은 아무리 생각해도 용서가 안 돼. 전 영웅의 그릇이 아닌가보네요. 미워할테다... 이제는 딱히 이름도

기억이 나질 않지만 그래도 미워할 거야... 진짜 이름도 기억이 안 나네? 평생 못 잊을 것만 같더니.

과거 시대의 신비함과 모험의 흥분, 정의로운 지도자의 길을 걷기 위해 올곧게 나아가지만 점점 진창에 빠져가는 영웅의 비극이

완벽에 가깝게 섞여 재미를 이루어낸 이 소설은 정말 읽을 만한 가치가 있다고 여겨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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