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귀 -일본


'시귀'는 '십이국기 시리즈'로 유명한 작가 '오노 후유미'가 98년도에 쓴 장편 호러소설입니다. 출시된 직후 즉시 베스트셀러의 자리에

올랐으며 10년이 지난 뒤 다시 만화화와 애니메이션화가 되는 등 재조명까지 받아 작품 자체만으로도 제법 풍성한 이야기거리를

가진 소설입니다. 저도 시귀를 만화책으로 처음 봤는데요, 만화화를 담당한 작가 분이 제가 좋아했던 만화 '봉신연의'를 그리셨던

분이라 흥미가 생겼었지요. 소설 시귀에 대해서는 그 전에도 물론 이름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북홀릭'에서 새로 편찬하기 전에 국내에

들어왔던 소설 시귀는 완역본이 아니었던지라 그리 읽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습니다. 만화책이 재미있어서 제대로된 완역본을

읽고 싶다는 마음이 든 찰나 때마침, 정확하게는 12년 7월 1일에 빠진 부분이 없이 완벽히 번역된 책이 나와서 참으로 기쁜 일이 아닐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신나게 책을 읽었는데 다 읽고 감상을 블로그에 써야지~ 하는 순간 때마침 컴퓨터가 고장이 나서 참으로 슬픈

일이 아닐 수가 없었습니다... 램을 뺐더니 금방 다시 잘 됐지만. 램 빼는데는 1분, 컴퓨터 청소한다고 먼지 터는데는 2시간...


'소토바'는 위아래로 길게 늘어지고 배가 볼록한 형태를 띈 대단히 폐쇄적인 마을입니다. 바로 근처에 '미조베'라는 꽤 큰 마을이 있긴

하지만 어지간한 일은 마을 안에서 해결하려는 관습이 습관처럼 전해지고 있지요. 이 마을에는 '삼역'이라 하여 절 '단나사' 스님들과

대대로 마을 정무를 도맡았던 '카네마사', 그리고 병원을 경영하는 의사 집안 '오자키'가 윗사람으로 마을을 대표하고 있습니다. 그중

카네마사 집안은 미조베로 본거지를 옮겨 그곳에서 소토바 마을을 위해 각종 정책을 만들고 있었습니다만 그만 가장이 급사를 하고

맙니다. 그건 뭐, 어쩔 수 없다쳐도 문제는 이 카네마사의 어르신이 죽기 전 소토바에 있던 자신의 집과 집터를 외부인에게 팔아버렸다는

점이지요. 외부인에 극히 냉담하고 배타적인 소토바 사람들은 카네마사의 집을 허물고 서양식 저택을 옮겨 지은 의문의 사람들에게 큰 관심을

가집니다. 그렇게 누가 이사를 올까 온 마을 사람들이 목을 빼고 기다리던 어느 날, 소토바의 북쪽 '야마이리'에 살던 세 노인이 대단히

이상한 방식으로 사망한 사건이 발생합니다. 병사인 것은 같은데 시신이 들개들에게 난자가 되어 끔찍한 모습이 되었던 것이지요.

그리고 그 뒤 야마이리에 갔었던 젊은 청년 '슈지'가 급사하고 다른 마을 사람들 또한 점점이 사망하는 일이 발생합니다. 의사 '오자키'는

이를 단순한 자연사로 보지 않고 전염병의 가능성을 의심하여 극히 신중한 움직임을 보이지만 시체는 날로 늘어날 뿐입니다. 그 와중에

카네마사의 집에 드디어 '키리시키' 일가라는 외부인이 이사를 오나 도통 주위에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점점 늘어나는 사망자와

좀처럼 얼굴을 내밀지 않고 집에만 숨어 있는 의문의 가족, 미신이 아직 살아있는 소토바에서는 키리시키가 귀신이라는 소문이 흐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오자키와 그의 친구이자 부주지스님인 '세이신'은 의문의 전염병의 정체를 파헤치려 안간힘을 쓰지만 전혀 엉뚱한

단서들만 점점 손 안에 늘어나고 혼란에 빠지게 되는데...


소설의 등장인물 소개에 나오는 인물만도 81명에 실제로는 그보다도 더 많인 인물이 나오고 분량만도 장편 다섯 권에 달하는 긴 이야기 

속에 담긴 호러는 대단한 효과를 자아냅니다. 느린 걸음으로 천천히 완벽한 배경을 만들어 낸 작가는 배경을 만들 때 처음부터 그어놨던

틈에 서서히 공포를 주입합니다. 틈이 점점 벌어지며 작가가 열심히 만든 소토바 마을이 서서히 갈라지기 시작하자 이번에는 작가가 

배경 안에 숨겨놨던 끈끈한 중유가 흘러나와 상황을 더욱 아수라장으로 만듭니다. 미지의 것에 대한 공포와 미지의 것을 대하는 자가 

보여주는 공포라는 이 두 가지가 한데 섞여 선인과 악인 구분하지 않고 모두 소멸시키려는 그 움직임은 과연 왜 이 소설이 일본의 호러 

소설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는 평을 듣는지 알 수 있게 합니다. 각 권 모두 500페이지가 넘는 제대로 긴 장편입니다만 분위기로, 

속도감으로, 공포로 독자를 끌어들이는 솜씨가 아주 훌륭해서 금방 다 읽어버리게 됩니다. 흡입력이 뛰어나고 단순히 공포를 넘어 그 

이상의 이야기를 제공하는 이 소설은 무척 만족스럽습니다. 그렇다고 불만이 아예 없는 건 아닙니다만. 역시 제일 불만족스러웠던 건 

오자키가 눈 앞의 비현실을 너무 쉽게 인정했다는 점이겠군요. 별 다른 경험의 도움 없이 그저 인지만으로 비현실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은 오자키가 그간 보였던 철저함과 조금 거리가 있는 인상입니다. 차라리 먼 발치에서 목격이나마 한 번 했다면 조금 설득력이 더 하지 

않았을까 싶네요. 오자키의 인정으로 인해 이야기 자체가 가속이 붙는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 점은 더욱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이야기의 

템포도 약간 들쑥날쑥한 감이 있지만 그건 분량을 보고 생각하면 사실 작가의 솜씨를 칭찬해야 할 부분이고... 

단점은 아니지만 한 가지 아쉬운 것은 만화와 다른 '나츠노'의 조기 강판이랄까요. 만화책에서 나츠노를 보고 멋있다고 생각했는데 

소설에서는... 소설에서도 꽤나 멋있는 삶의 자세를 지닌 매력적인 인물이었지만 만화를 먼저 보고 소설을 읽다보니 역시 그의 이른 

퇴장이 좀 아깝게 느껴지네요. 하긴, 나츠노가 아까워서 만화에서 그런 각색이 들어갔었던 것이겠지요.

여담입니다만 추석이라 시골에 내려갔었는데 친척들이 한데 모여 이런저런 뜬소문으로 궁시렁궁시렁대는 모습을 보니 소토바 같이

느껴져서 참... 시골은 확실히 특유의 분위기가 있어요. 소설과 달리 죽은 사람 없이 다들 화기애애하게 잘 헤어지긴 했지만.

애어른 안 가리고, 착한 사람 나쁜 사람 안 가리고 신나게 잘 죽이는 소설이지만 호러이면서도 호러를 넘으려는 자세까지 갖추고 있어

여러 사람에게 추천하고 싶은 소설입니다. 그리고 중후반부부터 만화와 꽤 차이가 크니 만화를 보셨다고 하더라도 한 번 읽어볼 가치가

있습니다. 애니메이션은 제가 보질 않아서 소설과 어디가 같고 어디가 다른지 말할 수가 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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