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계곡 - 재미가 없습니다. -미국


'시인의 계곡'은 소설 그 자체는 평범합니다만 등장인물에 있어서는 약간 특이한 면을 지니고 있습니다. 일단 이 소설은 '해리 보슈'

시리즈 중 하나로 주인공이 사립 탐정 해리 보슈이지요. 악역은 해리 보슈 시리즈의 작가가 쓴 다른 소설 '시인'에 나왔던 연쇄 살인마가

담당합니다. 경찰관들을 죽인 뒤 자살로 위장을 하고 유서 대신 '에드거 앨런 포'의 시 중 한 구절을 적은 종이를 남겨놓는 수법을

쓰던 살인마는 자신이 등장했던 소설 '시인'에서 죽은 것처럼 나왔지만 사실 몸을 숨긴 채 이곳저곳을 전전하다가 해리 보슈와 엮이게 

됩니다. 해리 보슈가 살인마 '시인'과 엮이게 되는 사연을 제공하는 것은 소설 '블러드 워크'에서 함께 생사를 넘나들었던 '테리 

매컬렙'입니다. 전직 FBI 요원 테리 매컬렙의 의문스러운 죽음을 조사하다가 어떻게하다보니 시인에게까지 다달은 것이지요.

결국 시인의 계곡은 작가 '마이클 코넬리'가 쓴 소설 세 편에 - 엄밀히 따지면 편수만으로는 세 편을 넘지요. 해리 보슈가 나온 것만 

몇 권이 넘으니 - 나왔던 등장인물들이 모여서 벌이는 일종의 콜라보레이션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한 쪽은 사람을 죽이고 다른 쪽은 

그런 살인범을 쫓는 것을 가리켜 협업이라고 부를 수 있을 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사실 '슈퍼로봇대전' 같이 다른 만화에서 활약하던 

주인공들이 모이는 식의 이야기나 스핀오프 시리즈에 본가의 인물이 등장하는 식의 - 예를 들자면 'CSI 마이애미'의 '호라시오' 반장이 

뉴욕으로 가서 'CSI 뉴욕'의 인물들과 함께 수사를 하는 식. CSI의 본가는 'CSI 라스베가스'이지만요. - 이야기는 기본적으로 여러 팬들의 

큰 기대를 안고 시작한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마징가'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도 '건담'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도 모두모두 큰 선물이

될 수 있는 게 슈퍼로봇대전이고 CSI 마이애미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도 CSI 뉴욕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도 모두모두 큰 재미를 안겨줄

수 있는 게 호라시오가 뉴욕에 가는 에피소드이겠지요. 그러니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시인의 계곡도 마이클 코넬리의 소설 시리즈를

읽은 사람들 누구에게라도 좋은 선물이 될 수 있을 것이었습니다. 등장인물들은 잘 채워놨으니 거기서 딱 한 가지만 더 추가되었다면 

말이지요. 그 한 가지는 바로 재미입니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하필이면 그게 없었네요.


아래에서부터 소설 시인의 계곡과 함께 소설 시인의 내용도 누설됩니다. 경고경고.


사립 탐정 해리 보슈는 자신의 친구이자 전직 FBI 요원인 테리 매컬렙의 죽음이 석연치않다는 매컬렙의 미망인 '그래시엘라'의 말을

듣고 조사를 해보겠다고 약속합니다. 한편 8년 전 연쇄 살인마 시인을 총으로 쐈던 FBI 요원 '레이철 월링'에게 시인이 다시 나타났다는

연락이 오고 그녀는 시인이 희생자들을 묻어놓았다는 지직스 로드로 향합니다. 매컬렙이 지내던 요트에서 시인에 대한 파일들을

발견한 보슈는 그 내용에 이끌려 라스베가스의 지직스 로드로 향하고 그곳에서 시인의 범행을 조사하던 FBI와 마주칩니다. 시인

때문에 한직으로 물러났다가 억지로 이번 수사에 참여하게 된 월링과 일개 사립 탐정인 보슈는 FBI와는 따로 움직이며 시인의 뒤를

쫓습니다. 레이철 월링에게 집착을 가지고 있는 시인이 그녀의 앞으로 남긴 단서들을 하나하나 추적하던 보슈는 이윽고 시인이

노리는 다음 희생자가 누구인지 알아차리고 시인을 붙잡기 위한 덫을 놓는데...


전개가 영 어설픕니다. 전작에서는 나름대로 영악하고 치밀했던 범인 시인이지만 이번에는 레이철에 대한 집착 외에는 달리 이렇다

할 무언가를 보여주질 못합니다. 사람들을 잔뜩 죽이고 자신의 정체까지 드러낸 뒤에 하는 일이라고는 레이철을 좀 스토킹하다가

'사실 나 이미 죽었음요.' 라고 시답잖은 장치 하나만 마련해놓고 끝입니다. 물론 이 장치는 뒤에 저지를 살인을 가리고 FBI의 수사를

조금 늦추길 바라는 정도의 기대만을 담은 것이긴 하나 그걸 감안해도 영... 게다가 그 뒤의 행보도 딱히 치밀하지 못합니다. 레이철

월링은 전작의 매력을 '잭 매커보이'한테 주고 왔는지 그닥 흥미로운 인물이 아니게 되었고 수사에 있어서도 꿔다놓은 보릿자루의

역할 이상은 하지 못합니다. 자주 등장하는데다 범인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긴 하나 그럼에도 비중이 없고 아예 공기 취급 받을

위기에 놓이면 민폐를 끼치는 등 유능한 구석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나마 해리 보슈는 열심히 자기 일을 하긴 하는데... 이번엔

육아가 그의 진정한 장애물입니다. '블랙 에코'에서 만났던 '엘레노어 위시'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에 대한 보슈의 관심에 비중이 

몰려서 집안일과 수사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쫓다보니 전개가 그리 깔끔하지 못합니다. 주요 등장인물 셋이서 다 한 번씩 헛다리를

짚으며 가다보니 살인마의 범죄도 영 대수롭잖게 보이고 그런 살인마를 쫓는 수사도 영 맥이 빠집니다. 폭우가 쏟아지는 가운데 

펼쳐지는 마지막의 추격 장면조차 앞서의 좌충우돌로 인해 뜬금없는 느낌이 들 지경이라 소설이 전반적으로 난국에 봉착했다는 느낌입니다.

많은 인물들이 다른 소설들에서 이미 자신의 무게감을 지닌 채 시인의 계곡에 참전을 했는데 그럼에도 다시 인물에게 무게감을

실어주려다가 결국 그 방향에서 힘을 과도하게 쏟아 정작 범죄와 수사 쪽이 가벼워지는 결과를 맞지 않았나 여겨집니다. 마치 호라시오

반장이 뉴욕 CSI에 방문하여 자신이 어떤 인물인지 알려주기 위해 CSI 마이애미 시즌1에서부터의 활약을 요약하여 설명을 하자 그

이야기를 들은 CSI 뉴욕의 인물들이 이번에는 자신들이 어떤 수사팀인지 호라시오에게 설명하기 위해 CSI 뉴욕 시즌1부터의 사건들에

대해 길게 늘여놓고 그제야 둘이 서로를 인정하나 사실은 호라시오에게는 남다른 아픔이 있었고 CSI 뉴욕 팀 역시 다른 사람들은

모르는 자신들만의 비밀이 있었으며 그 비밀들에 대해 한 차례씩 늘어놓은 뒤 그제야 범인을 찾으러 가야겠다고 깨닫고 5분만에

범인을 잡는 에피소드를 보고 느끼는 기분이 바로 시인의 계곡을 다 읽은 뒤의 기분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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