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전드 -유럽


'로버트 리텔'의 소설 '레전드'입니다. 제목인 레전드는 전설의 레전드! 가 아니고 위조된 신원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일전에 한번

미국 드라마 'NCIS'의 스핀오프 시리즈를 한 화인가 두 화인가 본 적이 있는데 거기서 주인공을 가리켜 신원이 알 수 없는 인물이란

의미로 레전드라 불렀었던 기억이 얼핏 나는데 이 소설에서도 그런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작가 로버트 리텔은 스파이 소설의

대가로 미 해군에 복무한 경험과 냉전 시대에 기자로 활동했던 경력을 살려 현실적이면서도 치밀한 작품들을 써 높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1935년생으로 수많은 작품들을 발표했는데 국내에는 레전드와 함께 데뷔작인 '르윈터의 망명'이 소개된 바 있습니다.

특이한 사항으로는 로버트 리텔의 형도 작가이며 아들도 작가라는 점입니다. 특히 아들 '조나단 리텔'은 프랑스 최고의 문학상인 

공쿠르상을 수상하기도 한 뛰어난 작가라는군요. 작가가 셋이나 있는 집안이라... 어쩐지 리텔가문의 어머니께서 고생이 크셨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전직 CIA요원인 사립탐정 '마틴 오덤'은 이상한 의뢰를 거절합니다. 언니의 남편이 사라졌는데 두 사람이 이혼을 할 수 있게 사라진

형부를 찾아달라는 의뢰였습니다. 언니가 독실한 유대교 루바비치파 신도인데 그 종교의 교리상 남편이 인정하지 않으면 이혼을

할 수가 없는데 이혼을 인정할 남편이 사라진 상태라 이대로라면 언니는 평생 독방을 지키며 살아야 할 판이라는 것이었지요. 대체

어디 쳐박혀 있을 지 모를 남편을 찾는 건 불가능하다 여긴 마틴이 의뢰인을 돌려보내자 이번엔 CIA의 국장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옵니다. 국장은 그를 만나 방금 전의 의뢰인인 '스텔라'의 형부를 찾지 말라고 경고하고 떠나지요. 이에 마틴은 스텔라를 만나 의뢰를

받아들이고(...) 형부인 '사마트'를 찾아나섭니다. 그런 마틴은 예전 CIA의 현장요원 시절 때 만든 세 명의 레전드 - 위조 신분 - 이

있는데 하나는 마틴 오덤이며 다른 하나는 '링컨 디트먼', 마지막은 '단테 피펜'이라는 인물입니다. 문제는 마틴이 정신분열증을

앓고 있어서 셋 모두 실제의 인격을 지닌 존재라는 것과 마틴이 CIA가 되기 전 단 한 사람이었을 때 과연 셋 중 누구였는가? 아니,

셋 중에 진짜 그가 있긴 한 건지도 모르는 상태라는 것이었습니다. 셋이서 하나인 마틴은 전 세계를 돌며 사마트를 찾아나서고

그 과정에서 각종 사건에 연관되고 깊게 숨겨져 있던 진실과도 마주하게 됩니다.


인물과 구조, 이야기 모두가 대단히 다각적이라 놀라운 소설입니다. 단순히 다중인격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만들어진 신분인

레전드와 그 레전드가 다중인격으로 변하였다는 설정은 참신하고 또 그에 대한 설정을 충실히 하고 작중에서 설명도 잘 이루어져

색다르면서도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사건 또한 스파이 소설답게 국제적으로 스케일이 크고 복잡하면서도 실존인물들을 끌어들여

현실감을 잘 살려 인상적이었지요. 인물의 포커스가 마틴 오덤들 - 링컨 디트먼, 단테 피펜 - 에게 맞춰져 있어 주변인물들의 매력이

덜 부각된 점은 조금 아쉽지만 주요 인물이 혼자서 3인분을 넘게 해내니까 - 수사적인 표현이 아니라 진짜로 - 불만을 가질 이유는

없었습니다. 전체적으로 완성도가 아주 뛰어나서 읽는 내내 즐거웠습니다.

이야기는 사마트를 찾기 위해 전 세계를 뒤지고 다니는 마틴 오덤과 함께 합니다. 그러다가 마틴 오덤의 레전드들이 탄생하고 활약하는

과거로 쉴 새 없이 넘나들지요. 정신이 없을 수도 있는데 뒤로 가면 갈수록 과거의 이야기와 현재의 상황이 접점을 이루어 마치

퍼즐처럼 짜맞춰지게 되는데 이를 알게되는 쾌감이 근사합니다.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비단 마틴 오덤 뿐만 아니라 작중의 모든

인물이 자기자신 뿐만이 아닌 레전드도 가지고 있음이 드러나면서 단순하던 모든 것들이 점점 복잡하고 다각적으로 변해가는 흐름이

부담스럽지 않고 자연스러웠습니다. 특히나 사마트의 경우, 그의 행적을 좇을수록 나쁜 남편이자 악한 폭력배에서 자선가의 모습,

그리고 사업가의 면모까지 드러나 한 인물임에도 보는 사람들에 따라 천차만별로 다르게 인식하는 점을 드러내어 천차만별로 다른

인물들이 한 사람의 안에 공존하고 있는 주인공 마틴 오덤과 대비를 잘 이루고 있다고 보여졌습니다. 마틴과 링컨, 단테의 삼위일체를 

시작으로 하여 이야기 내내 인물과 상황 모두에서 여러 면모가 하나를 이루고 있는 모습을 흥미있게 드러내는 솜씨가 대단하여 스파이

소설의 대가라 불리우는 작가의 실력을 잘 느낄 수 있었습니다.

굳이 단점을 꼽자면 역시 복잡하다는 것을 들 수 있겠습니다. 받아들이기에 따라 장점이기도 하고 단점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여겨집니다. 또한 스파이 소설답게 다양한 음모들이 나오는데 설득력이 있기는 합니다만 음모인지라 다분히 뻥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 생각했습니다. 특히나 작중 가장 큰 비밀인 CIA 국장이 꾸민 음모는 한 사람의 힘으로 했다고 말하는 자체가 조금

작위적이라 할 수 있을만치 너무 거대해서 마음에 걸렸습니다. 뭐, 007 같은 것에 나오는 스케일과 비교하면 그리 큰 것도 아니지만

현실성을 단단히 갖춰입은 소설이다보니 말이지요.

여담입니다만 소설의 후기를 보니 007에서 00, 즉 더블오가 살인이 허가된 요원을 의미하는 것이라 적혀있더군요. 007 시리즈를

하나도 빼놓지 않고 다 봤었는데 - 영화만 - 처음 안 사실이었습니다! 하긴 영화가 하도 꼬꼬마때부터 나온 거라 하나하나 일일이

기억하는 건 불가능하지만 더블오가 살인면허라는 뜻이었다니! 결국 007은 '일곱 번째 인간백정'이란 말이잖아!

흠흠, 아무튼 레전드는 훌륭한 완성도를 자랑하는 잘 쓰여진 스파이 소설입니다. '존 르 카레'의 작품 같은 스파이 소설을 즐기신다면

주저없이 추천할 수 있을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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