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은 움직이지 않는다 - 좀 유치한 감이... -일본


'요시다 슈이치'는 일본은 물론이고 우리나라에서도 대단히 유명한 작가입니다. '퍼레이드', '파크라이프', '악인', '요노스케 이야기'

등 그의 많은 작품들이 대부분 국내에 번역이 되었으며 하나같이 큰 인기를 누렸습니다. 저도 퍼레이드를 읽고 정말 재미있다고

생각하여 이후 그의 작품들을 꾸준히 읽어왔는데 실망한 적이 거의 없었습니다. 소소한 일상의 이야기에서부터 다양한 인물들이

복잡하게 얽히는 강한 드라마까지 다양한 장르에서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한 작가 요시다 슈이치가 이번에는 스파이 소설에 도전을

했습니다. 이 소설 '태양은 움직이지 않는다'는 작가의 데뷔 15주년에 맞춰 출간이 되었으며 이전까지의 작품들과 성격이 크게

다르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무튼 나름대로 많은 의미를 가진 책인 것 같은데 거기에다 대고 이런 말하긴 그렇지만 다 읽고

난 뒤 가장 먼저 머릿속에 떠오른 감상은 유치하잖아... 였습니다.


'다카노 가즈아키'는 'AN통신'의 기자로 베트남에 주재하고 있습니다. AN통신은 전 세계의 패션 트렌드나 셀러브러티들의 소식을

모아서 판매하는 조그마한 언론사입니다. 허나 그것은 겉모습 뿐이고 실제로는 'NHK'가 야심차게 준비했던 동양의 'CNN'을

만들기 위한 계획이 좌초되며 떠돌게 된 자금이 모여 만들어진 거대하고 은밀한 정보상이었습니다. 다카노는 한일전이 이뤄지는

중국의 한 스타디움에서 위구르인에 의한 폭탄 테러가 발생할 것임을 알고 그 정보를 팔기 위해 움직입니다. 그 와중에 베트남의

유전 개발에 중국의 국영 기업인 'CNOX'가 참여하지 않는다는 정보를 알게 되고 의문을 가지게 됩니다. 이해할 수 없는 CNOX의

행보에 뭐가 있음을 감지하고 행동을 개시하는 다카노는 그 과정에서 한국계 스파이인 '데이비드 김'과 의문의 미녀 'AYAKO',

일본의 국회의원 '이가라시 다쿠' 등과 엮이면서 중국 기업의 숨겨져 있던 음모와 마주치게 됩니다.


요시다 슈이치 특유의 섬세한 문체나 깊이있는 인물들은 여전합니다. 그러나 스파이 소설을 표방하는 것치고는 전반적으로 설정이

좀 낡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주인공 일행이 소속된 단체가 특정 국가의 조직이 아닌 다국적 정보상이라는 점은 나름대로

참신하지만 24시간 동안 연락이 되지 않으면 가슴 속의 폭탄이 터져 정보를 지킨다거나 에이전트가 죽으면 그 부하가 사망한

에이전트의 이름을 물려받는다는 식의 설정은 요즘 시대에는 좀 유치한 편이지요. 가슴 속의 폭탄이 뻥 터진다는 사실 자체는 뭐,

대단히 긴박하고 극단적입니다만 지나치게 직관적이고 물리적인 대처라 조금도 스마트하지 않네요... '제임스 본드'마저 시대의 

흐름에 맞춰 변화하고 있는 이 시기에는 암만 스파이라도 스타일리쉬함과 스마트함이 공존해야 간신히 버틸 수 있겠지요.

물론 스파이 장르의 소설이라고 다 세련되어야 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현실적이고 멋있지 않은 스파이도 얼마든지 가능하지요.

스파이들 전원에게 본드처럼 멋있으라고 주문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요. 게다가 현실의 스파이가 얼마나 무능하고 멍청한 지는

뉴스만 켜면 알 수 있기도 하지요... 정말이지 부끄러워서 원... 그렇더라도 이 소설 내의 스파이 집단에 대한 설정은 투박하여

현실적이지도, 세련되어 매력적이지도 않은 그 사이에 어중간하게 위치하고 있다 보여집니다. 어쩌면 스파이 집단의 실체는 전혀

드러나지 않은 채 그저 비장함만을 표현하여 조금 과시하는 듯 보이는 게 문제일 지도 모르겠네요.

전개는 긴박하나 인물들이 대부분 수동적으로 움직이는 점이 아쉽습니다. 처음부터 현존하는 정보를 얻어내어 그 정보를 판다는

설정이기에 정보를 직접 생산하는 것이 아니니 주인공들이 수동적일 수 밖에 없긴 합니다. 그렇다고는 하나 다카노, 데이비드 김 

& AYAKO, 이가라시 다쿠의 세 방향에서 진행되는 이야기의 주역들이 대부분 진행되는 상황에 그저 흘러가거나 아니면 상황 

자체를 놓친 채 자기만 따로 움직이는 식의 전개는 전체적인 이야기의 속도감과 맞지 않아 이질적인 감이 큽니다.

매 챕터마다 인물의 감정이나 세부적인 사실에 깊이 파고든 뒤 그로 인해 정체된 이야기를 움직여야 할 때마다 기업에 의해 납치

되거나 납치되거나 납치되는 등의 방법을 통해 주인공들로 하여금 전개를 따라잡게 한 뒤 다시 인물의 감정이나 세부적인 사실로

파고드는 것이 반복된다는 느낌이라 인물 중 누구도 주도적이라는 인식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조금 아쉬운 부분이네요.

게다가 정보상인 주인공들의 움직임이 과연 정보상에 맞는 지도 조금 의문입니다. 결과적으로는 중국의 기업에 의해 큰 손해를

보게 될 일본의 기업을 위해 별 다른 보수를 받지도 않고 발로 뛰어다는다는 식이 되어 정보상이면서 정보의 흐름을 제어하는 것이

아니라 얻어낸 정보에 쉼없이 휘둘리다 얻는 것도 없이 끝이 나게 됩니다. 이렇게 되니 AN통신의 비정함이 더욱 와닿지 않네요.


뜬금없지만 일본판 태양은 움직이지 않는다의 표지입니다. 국내판 표지가 참 마음에 안 들어서 찾아본 건데 이거 참... 움직이기

싫게 생긴 태양이네요... 

작가가 자신에게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게 아닌가 싶은 소설이었습니다. 다방면에 큰 재능을 보여주던 요시다 슈이치입니다만

스파이 소설에서까지 그 능력을 이어가지는 못했다는 게 제 개인적인 감상입니다. 후속작을 어느 정도 의식하고 있는 듯 느껴졌는데

나오지 않아도 상관없지만 굳이 출간된다면 인물과 큰 그림 사이의 연관 관계가 조금 더 강하게 이어진 채 전개되는 이야기이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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