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괴 -일본


범인의 정체를 직접적으로 언급할 예정이니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다카기 아키미쓰의 소설 유괴는 재미있는 시도가 인상적인 작품입니다. 실제 벌어졌던 유괴 살인 사건을 바탕으로 삼았기 때문이지요. 물론 실제 사건을 모티프로 삼은 작품은 참으로 많으니 어지간하면 인상적이라 부를 수 없습니다. 이 소설은 조금 더 재미있게 다루고 있기에 독특하다 할 수 있지요. 소설은 실제 일어났던 사건인 마사키 유괴 살인 사건을 제 1장에서 기무라 사건이라는 가명으로 다룹니다. 마사키 유괴 살인 사건은 1960년대에 벌어진 일입니다. 7세 아동을 유괴한 범인은 수차례 몸값을 요구하다가 결국 아이를 죽이고 말지요. 어린 아이를 죽인 잔인함도 주목할 만하나 범인이 엘리트 계층이라고 할 수 있는 치과 의사였기에 더욱 눈길을 끈 사건이었습니다. 소설 유괴에서는 이 사건의 범인 이름을 기무라로 바꿔 기무라 사건이라 명명하고 제 1장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법정을 배경으로 삼아 사건의 내용은 물론 작가가 직접 취재한 사건의 내막, 피해자 가족이나 범인 주변 사람들의 태도와 반응, 그리고 범인의 성격이나 심경 등을 아주 생생하게 그려내어 작가의 취재 실력을 알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지요. 허나 소설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소설 속 이야기의 범인이 이 기무라 사건을 분석하여 문제를 파악한 뒤 업그레이드한 수법을 자신이 벌인 사건에 써먹는다는 한 단계 더 나아간 내용을 쓰고 있습니다. , 실제로 일어났던 기무라 사건의 문제점을 극복한 범인이 저지른 범죄에 대해 이야기하는 소설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무척 단순한 구조이지만 파격적이기도 한 작품이겠습니다. 이 소설이 1961년도 작이라는 걸 감안한다면 더욱 그렇겠지요.

 

 7살 아이를 유괴한 뒤 살해한 잔인한 범죄를 저지른 기무라 시게후사의 재판이 진행되고 한 남자가 이를 지켜봅니다. 그는 붙잡힌 기무라를 한심하게 바라보며 자신은 저런 실수를 결코 하지 않으리라 다짐하지요. 기무라와 같은 범죄, 유괴를 저지르면서도 기무라와 달리 붙잡히지 않으려면 그가 어떠한 실수를 왜 했는지 알아야 했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기무라의 모든 공판에 다 참여하여 철저한 예습하기로 마음먹습니다. 얼마 뒤, 대부업체 사장의 외동아들이 유괴당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유괴범의 전화를 받은 가족들은 기무라 사건의 기억을 바탕으로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지만 하필 그때 배달부가 찾아왔다가 가족 간의 대화를 엿듣고 경찰에 신고합니다. 유괴범이 요구한 금액은 삼천만엔. 기무라 사건에서 범인이 요구한 돈의 10배나 되는 액수입니다. 형사들이 찾아오지만 유괴된 아이의 아버지 이노우에와 어머니 다에코는 그 정도 돈 따위 없어도 문제가 없다, 기무라 사건 때처럼 아이가 죽는 꼴을 보느니 유괴범이 원하는 대로 돈도 주고 무조건 시키는 대로 할 것이다, 경찰은 사건에 참여하지 말아주길 바란다고 강하게 요청합니다. 형사들은 몸값을 들고 가는 이노우에의 비서의 꽁무니를 쫓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습니다. 범인은 몸값을 받는 방법을 교묘하고 복잡하게 지정했고 받으러 나오지 않기도 하는 등 붙잡힐 위험을 피하고자 머리를 쓰지요. 형사들은 그 와중에 이노우에의 주변 인물들을 조사하며 범인 후보를 좁힙니다. 우여곡절 끝에 몸값이 전달되었으나 아이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범인은 전화로 돈을 잘 받아놓고도 돈 가방 안에 돈 대신 종잇조각만 들어있었다고 화를 내기도 합니다. 형사들이 좁힌 용의자들의 행동은 점점 이상해지고 아이는 돌아올 기색이 없으며 속이 탄 이노우에는 거액의 현상금을 내걸기까지 하는 등 사건은 점점 점입가경으로 빠져듭니다.

 

 소설도 재미있습니다만 작가 후기가 굉장히 인상적이었습니다. 추리소설가로 명성이 높긴 하나 편집자의 일을 했을 당시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게 없는 에도가와 란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거든요. 란포는 큰 고민 없이 일을 맡았다가 글이 써지지 않아 머리를 싸매고 있던 작가에게 졸작을 써보라고 권합니다. 어떤 편집자가 자신이 맡은 작가에게 졸작을 쓰라고 말을 할까요. 더 좋은 작품, 더 팔릴만한 작품을 써달라고 압박을 넣는 것도 아니고 말이지요. 이러한 말을 들은 작가는 졸작이어도 괜찮겠냐고 묻고 란포는 대 졸작을 한 번 써보시라고 웃으며 권했다 합니다. 그렇게 태어난 것이 이 뛰어난 작품인 유괴라고 하는군요. 다카기 아키미쓰라는 작가에 대한 란포의 이해가 얼마나 깊은지 알 수 있는 대목인 것 같습니다. 자신이 맡은 작가를 잘 이해하고 있다 믿는 편집자라면 한 번쯤 써먹어 볼 수도 있는 말일 듯도 하고요. 물론 부담감을 덜기만 하면 좋은 작품을 쓸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작가에게만 해야 할 말이겠지요. 아무 작가한테나 가서 졸작 좀 써주세요~ 라고 해봐야 돌아오는 건 재앙일 뿐...

 실제 사건을 기반으로 한 소설이라 설득력이 강하다는 장점이 눈에 띕니다. 그간 유괴를 다룬 소설들과 엄청나게 큰 차이를 보이지는 않지만 실존했던 사건을 배경으로 든든하게 깔고 들어가기에 픽션임에도 현실성을 어느 정도 보장받는 셈입니다. 유괴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인질과 돈의 교환 방식이라 할 수 있는데 이 소설에서의 방식은 굉장히 참신하다거나 엄청나게 설득력이 있지는 않습니다. 놀라운 구석이 분명 있지만 전대미문인 수준까지는 아닙니다. 독자의 시선을 흐트러뜨리려 좀 잡다해 보이는 장치를 줄줄 흘려놓거나 조금 무리가 아닐까 싶은 방식도 살짝 동원하긴 하지요. 모든 등장인물이 등장에 필연성을 가진 것도 아니고 그냥 소비만 되고 마는 인물도 있습니다. 이 소설에서의 인질 교환 방식은 평균 이상인 정도인 셈입니다. 그럼에도 본래 이상의 설득력을 갖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는 앞서 기무라 사건을 자세히 설명하고 그 방식을 독자에게 철저히 숙지시켜 놓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벌어졌던 기무라 사건의 방식을 업그레이드한 범인이기에 기무라 사건과 비슷하게 대응하는 경찰의 움직임에도 설득력이 생기고 그러한 경찰의 움직임을 범인이 능가하는 것에도 설득력이 생깁니다. 인질 가족들이 가지는 경찰에 대한 불신이나 형사들의 초조한 태도 모두 두 번째 비극이라는 평범하지 않은 설정에 기대어 극적이면서도 현실성을 가지게 되는 것이지요. 상당히 세련된 전개라고 생각합니다.

 소설적인 재미도 충분합니다. 용의자를 찾는 방식이 정말 소설에서나 할 법한 화끈함을 보여주는데 이 또한 기무라 사건이라는 설정에서 설득력을 얻기에 독자는 허를 찔리면서도 수긍을 하게 됩니다. 소설이 거의 끝나갈 때쯤 탐정이 나와 좀 걱정했는데 문자 그대로 물량공세를 펼치며 눈을 사로잡더군요. 아주 근사했습니다.

 

범인 누설 주의

 

 이 소설은 번역에 대해 이야기할 부분이 있습니다. 번역이 나쁘다는 말은 아닙니다. 오타도 그리 눈에 띄지 않았고 문장도 매끄러워 읽기 좋았습니다. 다만 아무리 뛰어난 번역가라도 고민하게 만들었을 부분이 하나 존재하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바로 범인에 대한 것인데요. 유괴당한 아이가 범인을 부를 때 호칭이 문제였습니다. 우리나라 말은 촌수에 대한 개념이 워낙 확실해서 편합니다. 삼촌에 숙부, 백부, 고모, 이모, 숙모, 백모 등은 일본어에도 구분이 있긴 하나 대충 아저씨를 의미하는 おじさん이나 아줌마를 의미하는 おばさん으로 뭉뚱그려 말하는 게 보통이지요. 영어에서 uncleaunt처럼요. 하긴 엄마, 아빠 아니면 다 아저씨, 아줌마지 뭐. 우리나라에서는 좀 다르지요. 삼촌은 삼촌이지 아저씨가 아니고 이모를 아줌마라고 하지도 않습니다. ...저는 어릴 때 이모를 아줌마라고 부른 적이 있긴 했지만요. 그때 이모가 배를 잡고 웃는데 저는 왜 웃는지 모르고 계속 이모한테 아줌마 내 장난감 어딨쪄여? 라고 했다가 결국 어머니께 혼났습니다... 전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의 일에 대해선 거의 전부 잊었는데 혼난 건 엄청 많이 기억하고 있어요. 원한을 간직하는 아이였어... 무섭다, 어린 날의 나. 아무튼 이 おじさん이 가진 중의적인 의미를 아저씨라는 단어는 담아내질 못하는데 문제는 이 소설에서 범인이 바로 삼촌이라는 겁니다. 아이는 범인을 보며 おじさん이라고 부르는데 번역에선 아저씨가 됐습니다. 원문에서는 삼촌이 범인 후보에서 빠지지 않지만 번역에서는 후보에서 빠지게 되는 것이지요. 예전에 히가시노 게이고백마산장 살인사건에서도 히라가나와 가타가나를 섞어 쓰는 트릭이 있었는데 번역에서는 이를 담아내지 못했지요. 한국어를 완벽히 알고 외국어에 아무리 능숙해도 그 둘의 간극을 좁히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새삼 느꼈습니다.

 소설 유괴는 당시에도 참신했을 것이고 지금 읽어도 재미있는 훌륭한 작품입니다. 어디까지나 제 개인적인 평가이긴 하나 50년이 넘는 세월을 뛰어넘는 힘이 느껴지는 소설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한 번쯤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덧글

  • 아침 2014/12/16 00:32 # 답글

    마지막 반전에 반전에 반전까지도 감탄하면서 본 좋은 물건이지요. 다만 우리나라의 기준으로는 중간의 양육권과 관련된 반전이 아쉬운게 어머니쪽이 양육 우선권을 가지게 되는 경우가 많은 일본과 달리 우리나라는 아버지쪽이 양육 우선권을 가지게 되는 경우가 더 많아서 실종과 사망이 차이가 의미가 없어서 우리나라에서 살고 있는 사람으로서는 그쪽까지 생각이 가는게 어려웠다는 걸까요? 소설의 단점이라기 보다는 국가별 법의 차이로 인한 문제이긴 합니다만.

    그거 말고 조금 아쉬운 부분이라면 범인의 추리 과정에서 약간씩 비약이 있다는 느낌이었습니다. 기무라 사건과 이번에 벌어진 유괴 사건이 유사하다! 라고 주장하지만 살인, 상해, 도난 등과 달리 유괴 사건은 범행 대상과 범행 이유가 비슷한 경우가 많아서 (대상은 유치원-초등학생, 이유는 돈or성욕) 따라하는 건지 모르겠다! 라는 느낌이었던지라.-_-;; 그 외에도 이전 사건의 범행 수법에 대해 잘 알고 있다-집행과정을 본 것 아닐까! 하는 부분도 보통 범행 수법을 잘 알고 있다-이전 사건의 관계자라는 식의 사고부터 먼저 떠오를 것 같은데 말이죠..

    위에서 작품의 단점에 대해 말하긴했지만 그렇다 치더라도 정말 좋은 물건이라는 것만큼은 동의합니다. 말씀대로 세월을 뛰어넘는 힘이 느껴졌어요. 솔직히 지금 나왔다 하더라도 충분히 통할 물건이죠. 정말 엘릭시르는 이런 좋은 물건들을 잘도 찾아내서 정발해오는 것 같아요.ㅇㅅㅇ
  • 정윤성 2014/12/16 15:27 #

    아, 양육법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말씀 들으니 과연 그러네요. 생각치도 못한 부분에 대해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실 냉정하게 보면 기무라 때와 유사하다기보다는 단지 머리를 좀 쓰는 구석이 얼마 전의 기무라 사건처럼 보이는 것도 같고... 정도이긴 합니다. 60년대의 일본이 배경이니 테크닉을 구사하는 유괴 사건이 극히 적었으리라는 가정을 깔고 가야 수긍을 할 수 있을 법한 면이지요. 게다가 법정의 입회인이 아닐까 하는 것도 설득력은 있으나 디뎌야 할 돌을 몇 단계 정도 뛰어넘은 감이 있습니다. 허구다운 생략 정도로 받아들여야할 부분이겠지요.
    파계재판을 읽고 재밌네 다른 작품들도 기대되네 생각했는데 유괴는 그 기대를 충족시키고도 남았습니다. 정말 엘릭시르는 클래식 추리에 한이 맺힌 사람들이 모인 건지 잘도 찾아내네요... 그게 좋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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