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정 매뉴얼 -미국


 저는 프로레슬링을 좋아하는데요, 가끔 그런 걸 왜 보냐는 사람을 만나곤 합니다. 특히 UFC같은 이종격투기를 즐기는 사람은 프로레슬링을 다 짜고 하는 것이라며 폄하하는 경우를 의외로 자주 보곤 하지요. 그래서 나는 UFC 싫어. 봐도 재미없어.”라고 대답을 하면 이해를 하지 못합니다. 왜 짜고 치는 고스톱을 리얼한 진짜 격투기보다 더 좋아하는가, 즉 각본의 유무에 따라 우열을 가른 뒤 우월한 것을 놔두고 열등한 것을 즐긴다는 문제로 패러다임을 끌고 가기 때문에 이해를 하지 못하는 것이겠지요. 허나 우월과 열등의 관점을 적용할 수 있는 대상은 생각보다 그리 많지 않습니다. 또한 굳이 덧붙이자면 자신이 우월하다고 믿는 어떤 것을 향유한다고 해서 스스로가 우월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700만원 어치 쇼핑을 했다고 해서 주차요원을 무릎 꿇릴 수 있는 우월함이 생겨나지 않는 것처럼 말이지요.

 프로레슬링은 각본이 있기 때문에 이기는 놈만 이기며 그렇기에 뻔하다, 라는 주장은 얼핏 맞는 것 같으면서도 반박하자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단순하고 폭력적인 관점에 불과합니다. 프로레슬링은 열심히 훈련한 선수들이 고난이도의 연기를 보이는 드라마다, 각본이 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약한 선수가 이기기도 하고 절대강자로 보이는 선수가 지기도 하는 예측불가능성이 있다, 리얼함으론 얻을 수 없는 엔터테인먼트가 존재하며 따라서 이종격투기와 우열을 가릴 수 없다, 등등. 허나 이 반론들이 무너질 가능성 또한 각본 때문에 생겨납니다. 크게 호평 받은 각본, 선역 레슬러가 구석에서 두드려 맞다가 한 순간에 믿을 수 없는 힘이 생긴 것 마냥 악역 레슬러를 단숨에 때려눕힌다는 식의 각본이 인기가 좋다고 하여 매번 반복하기만 한다면 이는 현상유지를 빙자한 점진적 자멸인 셈이지요. 각본이란 결국 재미가 지루함으로 바뀌지 않도록 끊임없이 변화하고 진화해야 한다는 숙명을 가졌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혹시나 역시나 존 시나는 이제 그만

 추리소설도 프로레슬링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패턴을 큰 틀에서건 작은 틀에서건 하염없이 바꿔나가지 않으면 어차피 탐정이 범인 잡는 이야기라는 편견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다행스럽게도 많은 작가들이 멋진 도전을 통해 이러한 편견에 맞서 추리소설을 진화시키고 있으며 이는 기쁜 일이라 아니 할 수가 없습니다. 쓰고 보니 너무 장식적인 표현 같네요. 저도 진화하는 감상문을 써야 하는데, 무리.

 ‘탐정 매뉴얼은 작가 제더다이어 베리의 데뷔작입니다. 작가는 이 작품으로 2009해밋 상(Hammett Prize)’, 2010년에는 크로포드 상(Crawford Award)’을 수상했습니다. 참고로 해밋 상은 캐나다와 미국 작가가 쓴 영어 범죄 소설이라는 범위 내에서 뛰어난 작품에 수여하는 상이며 크로포드 상은 판타지 소설을 쓴 작가에게 수여하는 신인상입니다. 탐정 매뉴얼은 판타지 범죄 소설이라는 말이지요. 앞에서 끊임없이 변화해야 한다는 말을 길게 적었던 건 탐정 매뉴얼이 그 결과물 중 하나란 말을 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판타지 범죄 소설이란 과연 무엇일까요? 판타지 세계에서 이루어진 범죄 이야기일까요, 아니면 판타스틱한 범죄가 일어난 이야기일까요?

 

 탐정회사의 서기인 찰스 언윈은 요즘 사는 맛이 없습니다. 최고의 범죄자 어넉 호프만과 맞서며 최고령 피살자’, ‘베이커 대령의 세 번의 죽음같은 놀라운 사건들을 해결한 인기인이자 자신이 담당하는 탐정인 시바트가 최근 아무래도 좋은 사건들만 맡아 자신까지 맥이 빠진 것이지요. 언윈은 시바트의 성과를 모아서 정리하는 일을 했기에 탐정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였습니다. 그는 찬란한 빛 속에 있던 시바트의 그림자나 마찬가지였으니 시바트가 빛을 잃고 그림자가 되자 스스로가 그림자의 그림자라는 하잘 것 없는 존재가 되었다 여겨 회사를 떠나려 합니다. 도시를 떠나는 기차표를 사고 역에서 기다리던 언윈은 우연히 격자무늬 코트를 입은 여인을 보게 됩니다. 여인에게 첫 눈에 반한 언윈은 떠나려던 발길을 멈추고 대신 매일 기차역으로 가 여인을 멀리서 바라본 뒤 회사로 출근하는 일상을 반복하지요. 그러던 중 어느 날 탐정 피스가 나타나 그를 향해 책 한 권을 내밀며 말합니다. 당신은 이제 서기가 아니라 탐정이며 이 책은 탐정 매뉴얼이니 반드시 읽어보라고. 제 할 말만 한 피스 탐정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언윈은 혼란에 빠집니다. 20년이나 서기로 살았는데 뜬금없이 탐정이라니? 뭔가 행정적 착오가 있었을 거란 생각에 수석 서기를 찾아가지만 수석 서기는 언윈을 탐정님이라 부르며 새로 배정받은 탐정실의 방 번호를 가르쳐줍니다. 언윈은 이번엔 탐정의 상관이자 사건을 맡기는 역할인 관찰자의 방으로 찾아갑니다. 관찰자 에드워드 레이미크의 방에 간 언윈은 자신은 탐정이 아니고 탐정이 될 마음도 없다는 말을 하려다가 그가 어떤 물음에도 대답을 해주지 않을 것임을 알아차립니다. 레이미크는 자신의 책상에 앉은 채 살해당한 상태였으니까요.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당황하던 언윈의 등 뒤로 노크 소리가 들립니다. 의뢰인이 레이미크를 찾아온 것이었지요. 이대로라면 언윈은 서기에서 한 순간에 탐정이 되었다가 또 한 순간에 살인범으로 몰릴 판입니다.

 

 묘한 소설입니다. 특히 초반 서술의 방향이 여기저기로 튀어다녀서 대체 뭘 읽고 있는 건가? 이게 그 유명하다는 의식의 흐름 기법인가? 라는 마음마저 듭니다만 그런 건 아니고 모호함에는 곧 익숙해집니다. 초반의 전개는 좀 난잡합니다. 짝사랑하는 여인을 훔쳐보며 회사에 할 변명을 생각하는 언윈의 소극적인 태도와 난데없이 나타나는 피스 탐정, 탐정이 되었다는 일방적인 전달을 받은 뒤 벌어지는 난해한 사건 등은 한데 그러모아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복작복작합니다. 이후 레이미크의 시체를 발견하는 부분에서부터 언윈은 탐정인 척하며 실제 탐정인 시바트를 찾아 자신의 위기를 극복하려는 마음으로 조금 적극적으로 변하는데 그런다고 정리되는 것은 딱히 없고 클레오파트라 그린우드같은 새로운 캐릭터들만 늘어나 더욱 복잡해집니다. 보통의 탐정 소설에서는 이야기가 갈래갈래 갈라지는 경향을 보이는 순간 탐정이 친절하게 정리하여 독자의 집중력을 되돌려주곤 하는데 이 소설에서는 그런 친절함이 그리 눈에 띄지 않습니다. 이러저러한 문제가 계속 생기고 있는데 일단 시바트부터 찾으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정도가 정리라면 정리겠네요. 게다가 꿈과 현실의 경계가 모호하여 어느 순간 꿈의 이야기로 들어갔다가 다시 현실로 넘어가는 식이라 정신 차리고 읽지 않으면 어디가 어떻게 되었나를 놓치고 맙니다. 이에 더해 현실의 사건도 현실감이 무척 떨어집니다. 집단 몽유병의 발발로 자고 있는 사람들이 수백 명씩 자명종을 훔쳐 어떤 저택에 모인다는 식의 사건은 독자인 내가 꿈에서 책을 읽고 있나 싶은 마음이 들 정도입니다. 이러한 경향은 중반까지 이어지는데 여기까지 잘 참고 따라왔다면 이야기 도중 툭툭 튀어나왔던 꿈이나 기이한 사건들이 사실은 다 이어져 있음이 드러납니다. 탐정 매뉴얼 일반판에는 삭제된 금지된 기술, 꿈의 탐정법이 등장하며 꿈이 관측 및 기록 가능하다는 것이 밝혀지기 때문이지요. 이야기 내내 잊을 만하면 다뤄졌던 꿈은 실제로도 현실 밖으로 흘러나와 있었던 것입니다. 꿈을 엿보며 범죄를 저지르고 범죄를 막는 판타지에 나올 법한 수사가 진행되는 것이지요. 이래서 탐정 매뉴얼이 범죄소설에 주는 상과 판타지소설에 주는 상을 모두 받은 것입니다.

 소설은 비가 하염없이 내리는 도시를 배경으로 삼고 있습니다. 음울한 배경 속에는 범죄의 온상인 순회하지 않는 카니발도 자리 잡고 있지요. 멈추지 않는 비와 멈춰 선 카니발이라는 답답함 위에서 모자와 코트, 구두 등을 갖춰 입고 우산을 쓴 채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언윈이나 언윈의 모자를 타박하는 다른 탐정들의 모습에서 누아르의 패러디를 느낄 수 있습니다. 시가를 씹고 권총을 휘두르며 베일에 싸인 의문의 여성에게 휘둘리는 하드보일드의 느낌도 슬쩍 내비치고 있지요. 소설은 추리소설이라는 장르를 광범위하게 패러디하며 동시에 미이라의 실종, 세 번 죽은 악당, 사라진 1112일 사건 같이 웨스 앤더슨감독의 작품 같은 모호하고 동화 같은 감각도 제공합니다. 작가의 야망은 장르라는 문법에서 만족하거나 다른 장르의 장점들을 더하는 정도에서 머물지 않고 더 많은 것을 끌어안으려 노력했으며 이는 상당히 성공적으로 보입니다. 담아내고자 한 것이 아주 많아 초반에는 위태로워 보였지만 이내 몽환적인 이야기들이 논리라는 끈으로 단단히 묶여 있다는 것이 드러나고 화려한 카니발의 준비가 끝났음을 알게 됩니다.

 전개 자체는 복잡하지만 꿈과 현실의 관계를 이해하면 이해는 간단합니다. 다만 꿈 탐정법이라는 설정에 이야기 전체가 지나치게 매달린 것이 아닌가 싶은 마음도 들었습니다. 꿈에 관한 문제를 덜어내고 보면 남는 것은 성기게 얽힌 인간관계 정도만이 남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거든요. 물론 꿈이 무척 중요한 소재가 덜어내면 안 되긴 합니다만색다른 즐거움이 있어 읽는 맛이 충분하리라 여겨집니다. 독특한 추리소설을 읽고 싶으시다면 추천할 만한 작품이네요. 허나 깔끔하게 정돈되어 흘러가는 이야기를 선호하신다면 추천하기는 조금 힘들 것 같습니다. 빗물이 마지막에 가서야 한 줄기로 모여 하수로 흘러가는 것처럼 초반에는 이야기가 점점이 쏟아지거든요.



덧글

  • hansang 2015/01/19 18:01 # 답글

    재미있겠네요. "꿈탐정"이라고 하니 "파프리카"가 떠오르기도 하고요. 꼭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 정윤성 2015/01/19 18:17 #

    앗, 그러고보니 파프리카를 봐야겠다고 생각만 하다가 잊고 있었습니다. 저는 이참에 파프리카를 봐야겠네요.ㅎㅎ
  • watermoon 2015/01/21 23:18 # 답글

    파프리카는 재밌었는데 이 탐정메뉴얼은 도저히 도서관에서 맨날
    앞부분만 보다가 포기한답니다, ㅎㅎㅎ
  • 정윤성 2015/01/22 00:05 #

    저도 앞부분만 봤을 땐 이게 대체 뭐지??? 싶어서 몇 번이고 다시 읽고 그랬습니다.ㅎㅎㅎ
    아, 파프리카 빨리 보고 싶네요. 주말에 봐야지. 기대됩니다!
  • 책과기타 2019/05/03 23:30 # 답글

    읽을때 이해되진 않았어도 읽다보니 엄청 후루룩 정말 재밌게 봤던거같아요ㅎㅎ
    보면볼수록 매력있는 소설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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