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스머신 - 들러리 클럽의 음모 편 감상 -일본

 * 이하의 글에서는 애크로이드 살인사건의 범인이 대놓고 공개됩니다.

 녹스 머신은 추리작가 노리즈키 린타로의 단편집입니다. 총 네 편의 단편으로 구성된 이 작품은 SF와 미스터리가 결합되어 패러디의 방식으로 기존의 추리소설에 대한 본질을 되새긴다는 놀라운 작업을 시도합니다. 노리즈키 린타로는 고뇌하는 작가라는 별명답게 작품마다 언제나 새로운 시도와 진지한 사유가 담고 있지요. 이 작품 녹스 머신에 수록된 단편들에도 각자 다른 방식으로 추리라는 장르에 대한 관심과 애정 그리고 앞으로 나아가야할 방향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중 저는 들러리 클럽의 음모부분만 따로 떼어 감상을 적어볼까 합니다.

 

 남미의 농장에서 머물던 나 헤이스팅스에게 왓슨박사의 편지가 도착합니다. 내가 가입한 클럽이자 왓슨 박사가 회장으로 역임하고 있는 들러리 클럽의 존속과 탐정소설의 미래가 달린 일이니 ‘A.C’에 대한 처우를 함께 논의하자는 내용이었지요. 영국으로 향하는 배에서 나는 왓슨 박사를 진노케 한 A.C, 애거서 크리스티의 신작 열 개의 인디언 인형(=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교정쇄를 읽습니다. 작품은 기존의 탐정소설과 너무나 달랐지만 완벽하고 놀라운 소설임에 틀림없었습니다. 영국에 도착한 뒤 클럽의 별장으로 향하니 회장 왓슨 박사와 의장 크리스토퍼 저비스’, 정식 회원인 머빈 번터’, ‘해롤드 메리필드라이오넬 타운센드에 미국지부의 대표인 밴 다인변호사와 아치 굿윈까지 모여 있었습니다. 늙고 술에 취한 왓슨은 추리소설의 변화를 견디지 못하고 분노에 찬 푸념을 늘어놓습니다. 뛰어난 탐정과 그를 보좌하는 훌륭한 전기 작가로 이루어진 구성이야말로 탐정소설의 기본이자 왕도인데 그런 흐름을 낡았다고 폄하하고 자신들을 배제하려는 시도가 이어지는 것에 화를 내는 것이었지요. 이 분노는 사랑에 빠져 앞뒤 분간을 못한 필립 트렌트나 조수 없이 혼자 뛰어다니고 수기도 직접 쓴 애플비 경감등에게 튑니다. 물론 그들은 들러리가 아니니 클럽에 와 있지도 않고 왓슨 박사의 험담을 들을 수도 없지요. 회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밴 다인 변호사가 화두를 꺼냅니다. 하드보일드 소설을 폄하하고 드루리 레인엘러리 퀸에 대한 험담을 좀 한 뒤 크리스티 여사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지요. 13년 전 애크로이드 살인사건으로 시작된 크리스티 여사와 들러리 클럽 간의 불화가 열 개의 인디언 인형으로 재발했고 이제 더 이상 그녀를 봐줄 수 없다는 내용의 주장이었습니다. 크리스티 여사가 과거 한동안 행방불명되었던 사건도 알려진 바에 따르면 남편의 바람과 이혼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은 여사가 잠깐 기억상실에 걸린 것이었으나 사실은 들러리 클럽이 그녀를 납치해 다시는 애크로이드 살인사건 같은 소설을 쓰지 말라고 엄포를 놓았던 것이었지요. 그녀를 납치한 네 사람의 회원, ‘4’는 왓슨 박사, 밴 다인 변호사, ‘줄리어스 리커드그리고 ‘M. P. 이었던 것입니다. 점잖았던 회원들이 납치라는 미친 짓을 벌이게 할 정도로 애크로이드 살인사건의 여파는 컸던 것이지요. 허나 열 개의 인디언 인형은 더 충격적이고 더 놀라운 작품입니다. 이에 밴 다인 변호사는 아예 크리스티 여사를 죽여 이러한 작품이 세상에 나올 수 없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술에 취해 정신이 나간 왓슨 박사와 아첨꾼 타운센드를 제외한 회원들은 이 과격한 주장에 반대하고 결국 회의는 투표라는 방식을 선택합니다. 밴 다인의 의견에 동의하는 사람이 과반을 넘으면 크리스티 여사 암살이라는 말도 안 되는 행위가 실행이 될지도 모르는 상황. 허나 나는 고민에 빠집니다. 열 개의 인디언 인형이 보여준 놀라운 완성도는 결국 더 이상 에르큘 포와로와 내가 필요가 없다는 말과 다를 게 없으니까요. 자신들을 만든 크리스티 여사를 죽일 수는 결코 없지만 명탐정 친구와의 모험이 끝나는 것 또한 견디기 힘든 일이었습니다. 과격한 밴 다인, 왓슨, 타운센드 그리고 온건한 번터, 메리필드, 굿윈. 크리스티 여사의 목숨은 헤이스팅스의 투표에 달려 있습니다.

 

 첫 장부터 웃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큭큭큭 웃다가 나중에는 꺼이꺼이 소리를 내서 스스로도 이게 웃는 건지 우는 건지 구분을 못할 지경이었지요. 탐정이 아닌 들러리 캐릭터들이 만든 클럽에서 탐정소설의 정통성을 유지하기 위해 납치는 물론이고 암살까지 벌이려 한다는 참신한 발상을 추리소설의 틀을 유지한 채 훌륭한 전개로 그려낸 놀라운 단편입니다.

 처음에는 가상의 인물들이 실제 작가들과 함께 실존하는 것처럼 설정이 짜인 줄 알았지만 읽다보니 작가에 의해 가상의 인물들이 현실화하는 식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픽션과 현실의 경계가 요상하게 이어져 있어 작가가 명기된 애거서 크리스티 이외에는 작가라는 존재가 없는 대신 들러리 클럽의 회원들이 대신 전기 작가의 역할을 하는 등 경계선이 모호하지요. 게다가 애플비 경감의 경우 애플비의 왓슨이던 자일즈 고트가 두 편에만 등장하고 사라진 것을 두고 클럽이 파견한 인물을 애플비가 쳐냈다는 식으로 말을 하고 엘러리 퀸의 경우에는 클럽이 전기 작가를 하나 마련해주려고 할 때마다 아버지 퀸 경감이 왓슨 역할이라며 에둘러 거절했다는 식으로 이야기합니다. , 왓슨 이후의 왓슨 캐릭터들은 대부분이 클럽에서 탐정에게 붙여준 작가 대리인이라는 설정이지요. 헤이스팅스의 경우에는 작가가 애거서 크리스티라는 점이 뚜렷하지만 크리스티 여사가 포와로와 헤이스팅스의 모험을 쓰면 그 둘이 함께 모험을 한다는 식으로 역시나 경계가 모호합니다. 이 점은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야 할 부분인 것 같네요. 제가 또 어물쩍 넘어가는 것 하나는 잘 하지요! 자랑할 건 아닌가.

 이야기는 크리스티 여사를 죽이려는 밴 다인과 막으려는 헤이스팅스의 대립으로 전개됩니다. 물론 이 대립 자체가 뚜렷하지는 않고 그저 황금기를 지나는 추리소설에 대한 작가의 지식과 애정이 등장인물들의 입을 통해 드러나는 것이 더욱 주되지요. ‘셜록 홈즈나 에르큘 포와로, ‘손다이크박사. ‘네로 울프’, 엘러리 퀸 같이 잘 알려진 탐정들은 물론이고 프린스 잘레스키’, 필립 트렌트, 구석의 노인처럼 약간 마이너한 탐정을 포함하는 것도 모자라 콘티넨탈 탐정같은 하드보일드 장르까지 한데 끌어 모아 작가가 얼마나 추리라는 장르를 사랑하는지 드러냅니다. 방대한 지식을 눈치 보지 않고 마구 늘어놓는 모습이 참으로 오타쿠스러워서 좋더군요. 그래, 성공한 오타쿠는 이래야지!

 허나 문제는 이 소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애거서 크리스티의 소설 애크로이드 살인사건과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를 반드시 읽어야 합니다. 이 두 소설의 내용을 모르면 재미는 반감되다 못해 아예 사라지고 말지요. 그래서 저는 굳은 마음으로 두 소설에 대한 치명적인 누설을이 아니라 애크로이드 살인사건에 대한 치명적인 누설을 하고자 합니다. 주의하세요.

 

 주의. 바로 다음 줄에서 애크로이드 살인사건의 범인이 대놓고 공개됩니다.

 

 애크로이드 살인사건은 놀랍게도 왓슨 역할을 하는 사람이 범인입니다. 추리소설은 독자의 예상을 뛰어넘기 위해 많은 시도를 했는데 그 중에는 피해자가 범인, 탐정이 범인, 이 책을 읽는 독자가 범인이라는 참신한 선택들도 있었지요. 애크로이드 살인사건은 왓슨이 범인이라는 선택으로 놀라움을 준 소설입니다. 그리고 그 때문에 들러리 클럽에서 난리가 날 수밖에 없었지요. ‘녹스의 10에는 탐정이 범인이어서는 안 된다.”는 조항이 있지만 왓슨이 범인이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 적힌 곳은 없습니다. 다만 왓슨은 왓슨이니까 범인이 아니겠지, 라는 고정관념이 있기 마련이지요. 그 고정관념을 노린 것이 바로 애크로이드 살인사건이며 애거스 크리스티라는 작가의 대단함입니다.

 실제로 크리스티 여사는 행방불명 된 적이 있습니다. 11일간 실종되었고 이때 같은 여류 작가인 도로시 세이어즈가 수색작전에 참여하기도 했지요. 이 실제 사건이 사실은 왓슨들이 그녀를 납치한 것이었다니 참으로 깜찍한 설정이라 아니 할 수가 없네요. 납치한 이유도 다시는 왓슨 역할의 인물을 범인으로 만들지 말라고 엄포를 놓기 위함이었으니, 진짜 재밌습니다. 다만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의 경우에는 아예 크리스티 여사를 죽이려 드니 좀 과격하지만요.

 추리소설의 팬이라면 어떤 탐정이 가장 유능한지, 가장 매력적인지 고민하기도 하고 토론하기도 했을 법합니다. ‘명탐정 따위 두렵지 않다같은 작품에선 명탐정 네 사람이 함께 수사를 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고요. 허나 어떤 왓슨이, 어떤 들러리가 가장 골 때리는 인간인지에 대해 이야기하는 소설이 나올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네요. 긴 시간을 추리소설에 대해 사유한 노리즈키 린타로 정도의 작가만이 만들 수 있는 이야기라 생각합니다.

 추리소설을 누구보다도 더 좋아한다는 자신이 있는 분들께는 더 할 나위없는 즐거움을 주는 소설이리라 생각합니다. 허나 옛날 황금기 추리소설에 대한 지식, 특히나 애크로이드 살인사건과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를 읽은 상태인 독자들만이 즐길 수 있는 소설입니다. 황금기의 추리소설은 지금 봐도 멋지지만 그걸 굳이 찾아 읽지 않는다고 해서 추리라는 장르에 애정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지요. 특히나 지금처럼 추리 장르가 이미 충분한 발전을 이뤄 세분화된 경우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그러니 봐도 별 재미없더라, 하시는 분들께선 절대 내 내공이 부족해서 즐기지 못했나보다 여기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허나 황금기 추리소설을 충분히 즐긴 분들이시라면 이 소설을 결코 놓치지 말라 권하고 싶네요



덧글

  • watermoon 2015/02/24 21:55 # 답글

    우와 소개만 읽어도 재밌겠어요 ㅎㅎㅎ
    저두 어릴때 애크로이드 살인사건 읽고 놀랐던 기억이 나요.
    음,...그치만 헤이스팅스가 없는 포와로나 왓슨이 없는 홈즈는
    잘난척할때마다 말리는 사람이 없어서 주변에 적이 너무 많아져서
    독살단하거나 맞아죽을거애요 ㅎㅎㅎ
  • 정윤성 2015/02/24 23:11 #

    재밌어요! 그런데 다른 단편들은 SF의 테이스트도 굉장히 강해서 좀 어려운 감도 있었습니다.
    저도 애크로이드 살인사건 어릴 때 읽었는데 이게 스타일즈 저택의 괴사건이랑 기억이 섞여서 이 책을 읽으면서 어라? 저택에서 살인범이었다가 아니었다가 왓슨 같은 사람이 범인이었던 내용이었나? 잠시 혼란이 왔었습니다ㅎㅎ
    !! 잘난 척하는데 말리는 사람이 없어서 죽을 위험이 늘어난다니 그 생각은 못했는데 정말 그러네요ㅋㅋ
    들러리가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중요한 역할이었어요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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