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비뽑기 - 마녀의 걸작 -미국


 출판사 엘릭시르를 통해 출간된 셜리 잭슨의 작품들 힐 하우스의 유령’, ‘우리는 언제나 성에 살았다그리고 제비뽑기를 읽었습니다. 힐 하우스의 유령과 우리는 언제나 성에 살았다를 읽었을 때 곧바로 감상문을 쓰려고 했으나 계속 글이 막히더라고요. 느낀 건 많은데 정리는 안 되고 쓰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 혼란스러워져서 아, 나는 아직 준비가 안 되었구나라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재미있게 읽고도 그냥 넘겼는데 제비뽑기에 이르러서는 이게 셜리 잭슨의 진면모구나, 그녀가 긴 세월동안 논란의 중심에 서 있는 이유구나, 라는 게 확 와 닿아서 다시금 셜리 잭슨의 작품에 대한 감상을 쓰고 싶어졌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 글 실력이 늘어난 건 아니니 이상한 소리나 늘어놓다가 맥없이 뚝 끊어질 수도 있어요. , 제 감상문이 요상한 게 어제오늘 일도 아니니까


 제비뽑기는 셜리 잭슨의 단편 21작품을 모은 단편집입니다. 스물 하나의 단편 모두가 놀라울 정도로 독자의 신경을 갉아먹고 불안에 떨게 하는 놀랍고도 징글징글한 작품이라 몇 페이지 되지도 않는 이야기를 읽고 힘이 빠져 책에서 눈을 떼길 반복했습니다. 짧은 이야기 속에 시작부터 위태로운 긴장감이 쭉 올라오고 불투명한 악의가 점점 선명해지는데 이 사악함이 소설 속에서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 책을 읽고 있는 저의 등 뒤에서 피어오르는 것이 느껴집니다.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른 사악함은 나의 주위는 물론이고 나 자신에게서도 흘러나오고 있다는 것을, 현실에서는 단지 경솔함, 혹은 솔직함이라는 이름으로 위장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악은 현존하며 사람은 악의를 숨처럼 내뱉고 숨처럼 들이마십니다. 문득 예전에 읽었던 도덕적인 인간은 왜 나쁜 사회를 만드는가의 한 내용이 떠오르더군요. 천국에 갈 수 있을 법한 사람이라는 주제의 설문에서 마더 테레사보다 더 높은 퍼센트를 획득한 인물이 바로 나 자신이었다는 부분 말이지요. 나는 일단 천국에 갈 수 있을 것 같은데 마더 테레사는 잘 모르겠네아마 못 가지 않을까? 라고 설문에 응한 사람의 수가 제법 된다는 것이지요. 천국의 존재 유무는 일단 차치하더라도 웃기지도 않은 결과지요.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기준이 마더 테레사의 삶이라면 저는 아무 불만도 털어놓지 않고 지옥의 문으로 뛰어들 것 같은데요. 아니, 평범한 수준의 선행이 기준이라도 탈락할 것 같아 조마조마할 건데물론 이런 생각에는 몇 가지 변명의 여지가 있습니다. 나는 나를 알지만 마더 테레사에 대해선 잘 모르니까. 어쩌면 마더 테레사는 겉으로는 목숨을 바쳐 봉사하는 삶을 살았지만 속으로 욕을 마구 했을 지도 모르지 않느냐, 같이 말이지요. 제가 쓰고도 이게 무슨 개풀 뜯어먹는 소리냐 싶지만요. 예전에는 이 같은 결과를 단지 자신만만함 정도로 해석했는데 셜리 잭슨의 작품들을 접한 지금은 좀 다릅니다. 이건 자신과 자신의 주위에 있는 사악함을 볼 수 없기에 가능한 발상이지요. 매일 보다보니까 이젠 안 보이는 거지요. 누가 가르쳐주지 않으면 볼 수 없고, 가르쳐줘도 오히려 가르쳐준 사람이 나쁜 놈으로 보이는 거지요.

 ‘성완종씨에 대해 이야기를 좀 해볼까요. 정치색을 드러낼 생각은 없으니 수꼴이니 좌빨이니 그런 관점은 좀 접어두시고. 고 성완종 씨가 죽기 전에 기자회견을 했지요. 거기서 그는 저는 친박입니다. 친이가 아닙니다.”라고 주장했습니다. 뉴스에서 그 광경을 보면서 뜬금없다는 생각을 했지요. “저는 죄가 없습니다.”오해입니다.” 혹은 억울합니다.”가 아니라 친박입니다.”가 해명의 자리에 놓였습니다. “나는 박근혜 대통령을 만드는데 크게 기여한 사람이다.”나는 죄가 없다.”가 동일선상에 놓인 겁니다. 왜죠? 크게 기여를 했건 안 했건, 친박이건 아니건 그건 죄와 관계가 없는 이야기잖아요. 설령 순수한 선의를 기반으로 하고 있더라도 법을 어겨가며 금품을 제공했다면 법에 의해 죄가 되는 게 맞습니다. 그걸 모를까요? 알겠지요. 그런데도 마치 마법의 주문처럼 나는 친박이다, 라는 말을 하고 또 했습니다. 법을 어겼지만 나를 처벌받고 싶지는 않다, 가 아니라 나는 처벌의 대상 자체가 아니다, 라는 주장을 하는 것처럼요. 제 생각에 고 성완종 씨가 그런 말을 한 까닭은 범죄가 상식의 자리를 차지해 어느새 범죄가 아니라 여겼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처음에야 범죄라고 생각했겠지요. 어쩔 수 없지, 돈을 발라줘야 사업이 되니까. 그게 수십 년 동안 반복되면 상식이 됩니다. 상식의 자리를 범죄에게 내어주면 돈으로 해결이 안 되는 문제에 봉착했을 때 법을 지켜가며 해야지, 가 아니라 액수의 문제인가? 연줄을 잘못 댔나? 라는 발상으로 넘어가게 되겠지요. 경험이 그게 맞다 말하는데요. 주위에서도 그게 맞다 말했겠지요. 맞는 일을 했는데 죄책감을 느껴야 하나요? 굳이 고 성완종 씨까지 거론할 필요는 사실 없습니다. 그냥 제가 그때 그런 생각을 했더라는 이야기지요. 음주운전 단속을 하는 경찰에 대해 다루는 텔레비전 프로그램만 봐도 단속에 걸린 사람 중 꼭 한 명은 이렇게 말합니다. “왜 나만 잡아.”, “다른 놈들 다 놔두고 왜 나만 잡느냐.” 니가 술을 마시고 운전을 했으니까 잡지술을 먹고 운전을 했는데 단속에 걸렸다, 라는 명백한 과정 사이에 굳이 남들도 다 했다, 라는 주장을 마치 논리마냥 집어넣으려고 합니다. 냉정하게 생각하면 말도 안 된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술잔을 앞에 두면 그게 되질 않아요. 자신이, 혹은 다른 사람이 속삭입니다. 마셔, 딱 한 잔인데 뭐 어때. 남들도 다 하는 건데. 안 걸려, 안 걸려. 그거 가지고 걸리면 전 국민이 다 걸리는 거지. 아니거든요. 아닌데도 자신이 이러한 주장을 논리라고 받아들였기에 자연스레 변명으로 흘러나오는 겁니다. 왜 나만 잡아. 다들 하는 거잖아.

 그런데 이걸 사악함이라고 불러야 하는 걸까요? 단지 멍청함이라고 해도 되지 않나요? 사업하고 정치하려면 뇌물을 먹여야 돼서 막 먹였지만 나는 죄가 없어, 술을 먹고 운전했지만 남들도 다 하는 거라서 나는 죄가 없어, 이건 욕심이나 어리석음이지 악의라고 부를 수 있는 걸까요? 웃기지도 않는 주장으로 정당성을 찾아보려는 애달픈 발버둥을 굳이 악이라는 거대한 표현으로 담아내야 하는 걸까요? 사악함 맞죠. 악의 맞습니다. 악이지요. 결과가 너무 끔찍하잖아요. 사실 결과라고 부를 수도 없잖아요. 끔찍한 결과가 계속 굴러가도록 스스로 바퀴가 된 거잖아요.

 원래는 더 은근하고 질척하고 오싹한데 너무 빤한 예만 든 것 같아서, 다들 아는 이야기만 줄줄 늘어놓은 것 같아서 자괴감이 드네요. 이게 아닌데. 제비뽑기를 읽고 느낀 건 이것보다도 더 깊은데 제 지적인 빈곤함이 표현력으로 드러나네요. 셜리 잭슨의 시야는 더 넓고 그녀가 말하는 현실과 악의의 관계는 더 복잡하다는 걸 알 것 같은데, 힐 하우스의 유령을 읽었을 때도, 우리는 언제나 성에 살았다를 읽었을 때도 이 정도 감상문을 쓰다가 글을 그냥 지워버렸었지요. 역시 직접 읽는 수밖에 없어요. 직접 읽고 왜 셜리 잭슨이 마녀라고 불렸는지, 살무사의 피를 빗자루에 찍어 글을 썼다는 평을 들었는지 느껴봐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미국 교과서에 제비뽑기를 실었다는 건 참 뭐랄까, 근사한 것 같아요. 예전에 프렌즈를 볼 때 너 학창시절에 반지의 제왕을 안 읽었어? 학교에서 읽으라고 했잖아.”라는 대사를 정확하진 않음. 기억에 의지한 거라. - 들었을 때도 참 근사하다고 생각했는데 그 때와 비슷한 마음이 듭니다. 그래, 학교에서 반지의 제왕과 제비뽑기 정도는 읽게 해야지.

 

 읽다보면 무섭고 지치는 책입니다. 책 속에서 흐릿한 악의를 들여다보고 있으면 어느새 현실에 만연한 악의를 선명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그건 힘든 일이지요. 힘드니까 해야 할 일이겠지요.



덧글

  • watermoon 2015/05/04 10:54 # 답글

    우리는 성에 살았다 읽고 한편의 호러무비를 본 느낌이었어요.
    그나저나 엑릭시르 출판사 참 맘에 드네요. ㅎㅎㅎㅎ
  • 정윤성 2015/05/04 17:03 #

    순진한 척 보이는 기괴한 분위기로 조마조마하게 조여가는 맛이 일품이지요.
    긴장감이 정말이지 어우... 대단했습니다.
    엘릭시르의 요즘 행보는 정말 마음에 쏙 들어요. 어쩜 이리 신기하게도 취향에 맞는 것만 내주는지!
  • 아침 2015/05/04 12:18 # 답글

    셜리잭슨은 정말 어떻게 감상을 써야할지 모르겠다는게모든 작품의 공통점인것 같습니다. 읽으면 읽을수록 보이지 않던 악의를 더더욱 느끼게 된달까요. 이런작가가 주부를 위한 인기 에세이 작가... 그니까 요즘으로 치면 주부 파워블로거 같은 느낌의 작가였었다니! 세상이란...
    뭐 이 대표작을 무심코 잡지에 실렸다가 폭풍의 중심이 되었지만 말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이 단편집에 악의 가능성도 있기를 기대했는데 없어서 아쉬웠지 말입니다 우리나라서는 에드거상 수상 모음집이었던가? 거기에 실려서 나왔는데 한창 셜리잭슨에 푹 빠져서 영어 일어 국어 안가리고 자료찾던 시기에(그렇다고 본인이 영어랑 일어 잘하는건 아니고..--) 너무 읽고 싶어서 2시간 걸려 대학도서관까지 가서 읽었는데 제비뽑기만큼 길이의 단편임에도 들인 시간이 아깝지 않았죠. 네타라서 자세히는 말못하지만 작중인물의 쪽지가...짧은 문장에 담겨진 악의가 정말 대단했죠#영어판도 pdf로 돌아다니긴 하는데 학문이 짧아서... 덕택에 굉장히 마음에 들어했는데 여긴 없어서 아쉽더군요. 엘릭시르가 내주면 꼭 살텐데...ㅠㅇㅠ
  • 정윤성 2015/05/04 17:09 #

    셜리 잭슨에 대한 충격과 배신감에 신문사가 터지도록 항의편지가 왔다는 일화에 웃었습니다.
    스탈린의 앞잡이냐 빨갱이냐고 매도당했다는 말엔 요즘 우리나라 생각이 들기도 하더군요.

    악의 가능성이란 단편에 대해선 전혀 몰랐는데 아침님 덕분에 다행스럽게도 알게 되었네요. 고마워요!
    검색해보니까 에드가상 수상모음집 2권에 수록되어 있다고 하네요. 종로와 남산 도서관에 있는데
    종로엔 대출불가... 아으... 남산도서관까지 1시간 반 정도 걸리는데. 그래도 읽어야지요! 에드가상
    수상모음집은 예전에 1권만 읽었었는데 2권에 보물이 숨겨져 있을 줄이야... 1권 재밌었는데 2권을
    안 읽은 걸 보면 단순히 구하지 못했던 것일수도 있겠지만요.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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