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쌈마이한 제목이 인상적인 ‘살인자에게 정의는 없다’를 읽었습니다. 마치 지옥행 급행열차를 타라! 같은 시대착오적인 느낌이라서 무척 좋네요. 원제는 ‘Right as rain’으로 건강한, 상태가 좋은 이라는 의미입니다. 작가 ‘조지 펠레카노스’는 1957년생으로 92년 작가로 데뷔하기까지 여러 직업을 전전했습니다. 오랜 기간 경험한 밑바닥 생활을 바탕으로 한 하드보일드 소설이 독자들에게 큰 사랑을 받았고 특히 이 살인자에게 정의는 없다를 비롯한 ‘사립탐정 데릭 스트레인지 시리즈’는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지요. 국내에는 현재 이 소설과 후속편인 ‘지옥에서 온 심판자’가 출간되어 있습니다. 지옥에서 온 심판자라… 더욱 쌈마이하네요.
수십 년 전에 경찰 생활을 접고 사립탐정으로 살아가며 나름대로 하루하루 만족스럽던 ‘데릭 스트레인지’에게 골치 아픈 의뢰가 하나 찾아옵니다. ‘레오나 윌슨’이 자기 아들의 명예를 되찾아달라고 부탁한 것이지요. 레오나의 아들 ‘크리스토퍼 윌슨’은 경찰이었는데 동료 경찰의 총에 맞아 죽었습니다. 크리스토퍼가 비번일 때 사복으로 어떤 민간인에게 총을 들이밀었는데 마침 그 광경을 지나가던 순찰차가 발견한 것이지요. 너무나 급작스러운 상황이라 서로 고래고래 소리만 지르다가 크리스토퍼의 총구가 경찰 쪽을 향했고 이에 크리스토퍼와 대치하고 있던 경관 ‘테리 퀸’은 그를 쏴버립니다. 나중에 가서야 크리스토퍼가 외치던 말이 자신이 경찰이라는 것과 뱃지 번호였다는 게 밝혀지지만 이미 때는 늦었지요. 크리스토퍼는 술에 취한 상태였고 단지 노상방뇨 중이던 민간인에게 지나치게 폭력적으로 대했기에 순직으로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테리 역시 당시 상황이 무척 혼란스러웠다는 점을 감안하여 정당방위를 인정받았지만 경찰직은 내려놓아야 했지요. 데릭은 이 모든 사건이 분명하고 어떤 감춰진 비밀도 없다고 생각했지만 슬퍼하는 중년 부인의 기대를 저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사건을 맡기로 한 데릭은 뭘 해야 할지 잘 모르겠지만 일단 열심히 하자고 결심합니다.
등장인물들 간의 관계가 아주 멋진 소설입니다. 대립할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였던 데릭과 테리 사이에 우정이 싹트는 과정이 무척 신선하면서도 설득력이 충분합니다. 데릭은 테리가 크리스토퍼를 쏜 이유의 기저에 인종차별이 있다는 점을 알고 있습니다. 크리스토퍼는 흑인이었고 민간인은 백인이었으며 테리도 백인이지요. 흑인이 백인을 제압한 채 총을 겨누고 있는 광경에서 테리는 이미 상황에 대한 판단을 내렸고 그 때문에 크리스토퍼 쪽이 경찰이라는 사실을 쉬이 깨달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 사실을 데릭은 알았고 테리 또한 아니라고 믿고 싶어 할 뿐 사실임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데릭 역시 흑인이지요. 데릭은 테리가 크리스토퍼를 쐈으며 그에게 인종차별적인 고정관념이 있다는 점을 알면서도 자연스럽게 친해집니다. 그 과정에서 데릭이 지닌 어른스러운 매력이 잘 드러나 감탄스럽습니다. 테리 또한 자기 내면의 모순에 갈등하는 모습이 무척 근사합니다. 어딜 봐도 친해질 수 없어 보였던 두 사람이 조금씩 가까워지고 서로를 인정하는 과정은 이 소설의 백미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 소설의 인물들이 매력적인 이유는 약점을 가감 없이 드러내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테리와의 관계나 사건 수사에서 어른스러운 모습을 보이는 데릭이지만 여성과의 관계에서는 비겁한 모습으로 일관합니다. 같이 식사를 하자는 연인의 연락을 받고 이를 피하기 위해 다른 여자들에게 전화를 하거나 윤락업소에 가는 등의 태도는 깊은 관계에 겁을 먹은 비겁한 남자의 전형이지요. 테리 역시 혼혈인 여자 친구와 사귀면서 자기 안에 있는 인종차별적 관점을 무시하거나 인정하려하지 않는 등의 한심한 모습을 보이거나 대부분의 상황에서 폭력에 기대는 단순한 태도로 일관하여 참 무식한 자세를 유지합니다. 무식하기로는 데릭도 만만치 않아서 마약 등의 약물 문제에 대해 약물을 아예 자유로 바꾸면 마약을 하다가 알아서 관둘 거라는 말도 안 되는 관점을 보이기도 합니다. 중독은 알아서 관둘 수 없으니 중독인 건데 말이지요. 허나 이런 무식함과 함께 다정하고 진지한 모습도 충분하여 사람이란 역시 다면적인 존재이고 완벽할 수 없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사건 자체는 무척 소소합니다. 일상에서 겪는다면 몇 개의 집안이 풍비 박살날 큰 사건이긴 하지만 픽션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스케일이 크다고 할 수 없지요. 소소한 사건이 성기게 얽혀있어 거대한 스케일이 주는 박력이나 촘촘하고 치밀하게 쌓아올린 완성도가 주는 재미는 없습니다. 그저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이 정도의 전개가 최선이겠지, 하는 마음이 드는 정도이지요. 말을 바꾸면 현실감이 강합니다. 대단할 것 없는 인물 둘이서 자기가 할 수 있는 한계 내에서 영웅적인 모습을 보인다는 점이 현실적이면서도 인상적이라 픽션이 주는 일반적인 즐거움이 아닌 색다른 맛이 있습니다.
매력적인 등장인물들 사이에서 물 흐르는 듯 이어지는 의외의 인간관계가 근사한 작품입니다. 폭력적이고 지적이지도 않지만 솔직한 맛이 있어 읽는 동안 즐거웠습니다. 그러나 폭력적이고 지적이지도 않아서 추천하기는 좀 망설여지네요. 솔직하다고 다 좋은 건 아니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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