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추는 조커, 밀실에서 검은 고양이를 꺼내는 방법 -일본

 국내에 번역되는 일본 추리작가들의 연령대가 점점 낮아지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60~70년대 생들이 주류를 이루었던 신본격 작가(원칙적으로는 80년대 후반에서 90년대 전반에 데뷔한 작가들을 일컫는 말입니다만)들 중 유명 작가의 작품 상당수가 국내에 소개된 상황이기도 하고 추리라는 장르 또한 트렌드의 변화를 따라가는 입장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70년대 후반에서 90년대 초반에 태어난 작가들의 소설이 번역 시장을 차지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일지도 모르겠네요. 허나 02년생인 요코미조 세이시와 91년생인 아오사키 유고의 소설이 같은 해에 번역 출간되는 모습은 꽤 재미있습니다.

 79년생인 기타야마 다케쿠니도 슬금슬금 번역되어 국내 추리소설 애호가들에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군요. 10년에 클락성 살인사건이 번역되긴 했습니다만 그 뒤 몇 년간 다른 작품들은 소개되지 않았지요. 작년 12월 엘릭시르를 통해 인어공주 탐정 그림의 수기가 출간된 데 이어 올해 8월 한스미디어를 통해 명탐정 오토노 준 시리즈인 춤추는 조커밀실에서 검은 고양이를 꺼내는 방법으로 다시 우리나라를 찾아왔습니다. 기타야마 다케쿠니는 물리의 기타야마라는 별명으로 불릴 정도로 물리트릭에 열중하는 작가입니다. 세기말적인 세계관이나 인간미가 흐릿한 등장인물이 많은 점도 특징입니다만 그건 뭐랄까 에반게리온 세대들이 한 번쯤은 지나야 하는 환승역 같은 느낌이라저는 에반게리온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생긴 게 애매하게 에일리언 닮았다고 느껴져서 징그러울 거면 확 징그럽고 멋질 거면 확 멋질 것이지 왜 저렇게 이도저도 아닌 거야, 라고 생각했었지요. 아무튼 기타야마 다케쿠니는 모리 히로시나 사토 유야, 니시오 이신처럼 메피스토 상을 수상하며 소설가로 데뷔했습니다. 메피스토 상 출신은 어쩐지 장르 문법에 머리부터 들이밀며 온갖 실험과 파격을 시도하다가 결국 자기만의 스타일을 지닌 오묘한 무언가를 줄창 쓰는 요상한 작가의 루트를 탈 것 같다는 인상이 있습니다만 기타야마는 나름대로 견실한 추리작가의 길을 걷는 중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소년 검열관 시리즈랑 단간론파 키리기리 시리즈가 얼른 번역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네요. 키리기리는 4권까지 나왔던데 어떻게 좀 안 되려나요.

 

 명탐정 오토노 준은 방구석 폐인에 무직인 니트입니다. 다행히 친구도 있고 집 근처 편의점까지는 제 발로 움직여서 중증의 히키코모리까지는 아니군요. 오토노 준은 자는 것과 도미노를 좋아하고 타인과 만나거나 사건에 휘말리는 것은 질색하는 훌륭한 니트입니다만 추리력이 아주 뛰어나다는 특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추리작가인 친구 시라세 뱌쿠야는 그런 오토노를 위해 자기 작업실에 탐정 사무소를 열고 오토노를 사건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습니다. 오토노는 시라세의 손에 이끌려 50장의 트럼프가 꽂힌 서바이벌 나이프에 찔린 시체 사건이나 아날로그시계만 도난당하는 사건, 폴라로이드 필름에 찍힌 다잉 메시지를 해석하는 사건, 독이 묻은 초콜릿 사건, 움직이는 눈사람에게 맞아 죽은 남자 사건, 순간이동하는 검은 고양이 사건, 사람을 잡아먹는 텔레비전 사건, 6년 전 음악실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 사건은 사건인데 벌어지기도 전에 해결된 사건, 방 한 가득 양초가 가득했던 자살 사건 등을 해결합니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이중 두 가지 정도는 오토노 준의 형이 해결한 것도 있지만 아무튼 소심한 명탐정은 이 사건 제가 반드시 해결할 지도모르겠어요라고 중얼거리며 열심히 남의 손에 이끌려 다닙니다.

 

 가볍게 읽기 좋은 추리소설입니다. 주요등장인물들이 하나같이 속 편하고 유쾌한 호인들이라 소심한 니트 오토노 준과 잘 어울립니다. 소심하지만 책임감 있는 탐정 오토노와 매사 긍정적인 시라세의 조합이 재미있고 얄미운 소리만 하지만 사람 좋은 이와토비 경감도 괜찮아서 캐릭터의 매력이 상당합니다. 추리는 우스울 정도로 전부 물리트릭이라 감탄이 나옵니다. 한 번쯤은 심리적인 트릭이 나올 법도 한데 누가 강제로 시킨 것처럼 아홉 개의 단편 모두에서 물리트릭만 나오니 대단하다면 대단합니다. 물론 모든 트릭이 다 설득력 있는 것은 아닙니다. 평범한 것도 있고 평범한 것 같지만 대단한 것도 있고 그냥 대단한 것도 있고 웃긴 것도 있고 영 말이 안 되지 않나 싶은 것도 있습니다. 제가 볼 때 CD를 이용한 트릭은 좀 말이 안 된다 싶더군요. 복잡하면서도 심플한 다잉 메시지는 꽤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트릭의 퀄리티가 들쑥날쑥한 점은 분명 단점입니다만 이해할 수 없는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트릭이란 게 원래 시도하면 반드시 되어야 한다, 보다는 말이 되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 것만도 아니다, 정도라도 재미있으면 괜찮다는 정도의 암묵적인 허용이 따르는 거라서아예 말도 안 된다고 느껴지면 아웃이지만요.
 캐릭터나 트릭보다 제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단편들이 가진 분위기의 다양성이었습니다. 시트콤처럼 마냥 가볍고 재미있는 단편이 있는가 하면 사건이 벌어졌음에도 마냥 일상적인 단편도 있고 생각보다 꽤 심각하고 진중한 이야기도 있어서 상당히 풍부하게 느껴졌습니다. 이야기의 도입부가 가벼웠음에도 무겁고 찝찝하게 끝나는 이야기나 상당히 진지하게 시작된 이야기가 아주 황당하고 우습게 끝나는 단편들을 보고 있으면 작가가 트릭을 만드는 것 이상으로 이야기를 세우고 이끄는 것에 최선을 다했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오랜만에 단편 추리의 묘미를 잘 맛볼 수 있어서 좋았어요.

 번역은 좋았는데 한 가지 이상했던 건 1권인 춤추는 조커에선 이인관(異人館)을 그냥 썼으면서 2권인 밀실에서 검은 고양이를 꺼내는 방법에선 이인관에 주석을 달아서 설명했다는 점입니다. 이런 건 사실 아무 것도 아닌 문제입니다만 은근히 이상하고 어색하게 느껴진단 말이지요.

 옮긴이의 말에도 적혀 있는 사항이긴 합니다만 이 시리즈의 가장 큰 문제는 다름 아니라 두 권에서 끝나버렸다는 점입니다. 단편 3개가 더 있긴 한데 단행본으로 엮을 정도의 분량이 아닌데다 작가가 7년 째 이 시리즈를 안 쓰고 있어서 3권이 나올 수가 없다고 하네요. 덕분에 달랑 두 권 읽어서 이제 간만 본 것 같은데 식사가 끝난 안타까운 상황이 되었습니다소년 검열관도 1권이 나온 뒤 7년이 지나서 후속 시리즈가 나오긴 했습니다만 오토노 준 시리즈는 과연 앞으로 어떻게 될 지. 그런 의미에서 매년 꾸준히 나오고 있는 단간론파 키리기리를 번역하는 것은 어떨까요? 게임의 외전을 노벨라이즈한 것이라 계약 관계가 복잡할 것 같긴 합니다만 그건 제가 걱정할 부분이 아니니까하하하!



덧글

  • WeissBlut 2016/10/19 08:39 # 답글

    어 어느새 추리소설 읽는 블로그로 돌아오셨네요. 재밌게 읽었는데 후속권이 안나오면 아무래도 좀 그렇죠.
  • 정윤성 2016/10/19 15:55 #

    헤헤 여전히 여가시간엔 게임의 비중이 좀 더 높긴 합니다만.
    7년이나 방치된 시리즈라고 하니 후속권에 대한 기대는 버려야 할 지도 모르겠네요.
  • 꺄꺄 2016/10/19 13:30 # 삭제 답글

    앗 이런.. 신나서 연달아 읽었는데 3권이 나올수가 없다구요? 전 긴다이치 코스케나.. 적어도 고전부 시리즈처럼은 쭉 번역본이 나오지 않을까 기대했었는데 충격이네요.....ㅎㅎ....... 전 이 시리즈 읽으면서 주인공은 역시 인복이 있다(..)는 것을 다시한번 깨달았습니다.ㅋㅋㅋㅋㅋㅋㅋㅋ
  • 정윤성 2016/10/19 15:59 #

    저도 아 이거 재밌다, 3권은 언제 나오려나ㅎㅎ 했는데 옮긴이의 말을 읽으니 이게 무슨 날벼락ㅜㅜ 주인공이 참 인복이 있지요. 좋은 친구에 믿어주는 경찰도 있고... 다들 뭔가 나사빠진 구석이 하나씩 있긴 하지만요.
  • 방울토마토 2016/10/19 22:35 # 답글

    이래서 시리즈물을 손대기가 두려워요.
    비블리아 고서당은 언제 7권이 나오려나..
  • 정윤성 2016/10/20 11:14 #

    정말 그렇습니다. 제대로 끝나지 않은 시리즈가 대체 얼마나 많은지...ㅜㅜ
    비블리아 고서당은 작가가 마무리 짓는 단계에 들어갔다고 했으니 제대로 끝은 날 것 같네요. 근데 끝난다니 그건 그것대로 또 슬퍼...ㅜㅜ 아무튼 빨리 7권이 읽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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