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의 세일즈맨 -미국

난 실패자가 아니야.” 나는 힘주어 이야기했다. “다만 돈이 없고, 멍청하고, 운이 지지리도 없을 뿐.”

 

 침묵의 세일즈맨은 작가 마이클 르윈의 앨버트 샘슨 시리즈의 네 번째 작품입니다. 첫 번째 작품인 인디애나 블루스(원제 Ask the Right Question)에 이어서 번역되었지요. 역자 후기를 보니 상업적으로 성공한 작품이라 시리즈 두 번째와 세 번째를 건너뛰고 먼저 국내에 출간했다고 하네요. 개인적으로는 일단 시리즈라면 현지 출간 순서대로 번역되는 쪽을 선호합니다만 인기 있었던 작품을 통해 시리즈 자체의 인지도를 올리는 것도 나쁘지 않은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파리 날리는 사립탐정 앨버트 샘슨의 사무소에 중년 여성이 찾아옵니다. 자기 동생이 근무지인 제약회사의 실험실에서 사고를 당해서 곧장 사내 의료시설에 입원을 했는데 면회를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지요. 무려 7개월 가까이 얼굴 한 번 보지 못했다는 말에 놀란 앨버트. 동생을 면회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의뢰를 받고 병원과 제약회사를 한바탕 돌아다닌 앨버트는 뭔가 석연치 않은 구석을 눈치챕니다. 사고에 대한 보험사나 경찰의 조사가 전혀 없었던 것이지요. 사고 당한 남자 존 피기를 조사하며 그의 부인과 변호사, 직장 동료 등을 만난 앨버트는 모은 단서들에서 숨겨진 음모가 있음을 직감하지만 난데없이 의뢰인이 의뢰를 취소합니다. 의뢰가 취소되건 말건 앨버트는 12년 만에 찾아온 딸과 함께 진실을 찾기 위해 뛰어다니고 멈추지 않는 그를 향해 위협의 손길이 뻗어옵니다.

 

 미국 미스터리에서의 사립탐정이라고 하면 필립 말로를 위시한 하드보일드 마초들이 먼저 떠오르지요. 술 마시고 담배 피우고 총에 맞고 다니는 강한 척하는 것이 삶의 지침인 사나이들 말입니다. 앨버트 샘슨은 그런 탐정들과 정반대에 있습니다. 오렌지 주스를 즐겨 마시고 한가한 사무소에서 십자말풀이를 하다가 심심하면 전처가 기르는 딸에게 근사한 편지를 쓰는 게 낙인 느긋한 아저씨지요. 침묵의 세일즈맨은 선량한 중년 탐정이 착한 일을 하고 다니는 소설입니다. 암만 소설이라고 해도 착한 사람이 착한 일을 하는 게 뭐가 재미있을까요? 아주 재미있더라고요.

 요즘은 착하게 사는 것이 영 힘든 시대입니다. 저도 막 나쁘게 살고 있어요. 죽으면 아마 카론의 나룻배 3등 칸 한 구석에 처박혀서 지옥으로 직행할 거라 생각해요. 이 소설은 1978년에 쓰였는데 당시의 인디애나도 지금 우리나라와 비슷하게 살기 쉽지 않은 곳이더군요. 사립탐정이 일이 없어 쫓겨날 준비를 하고 대졸자는 물론이고 생물학 박사마저 직업을 못 구해 빌빌대고이쯤 되면 과연 살기 좋았던 시절이 세상에 존재한 적이 있었나 의문이 들 정도입니다. 제가 꼬꼬마 시절 IMF가 터졌었지요. 학교 선생님은 너희가 커서 취직할 때쯤 되면 경제가 살아나 있을 거라고 했는데 개뿔, 그 이후로 경제가 살아난 적 따위 한 번도 없었어요. 매년 뉴스에선 죽겠다는 신음소리만 나왔지요. 정권의 입맛에 맞춰 성장률이 높아졌다거나 물가가 낮아졌다는 말이 나오기도 했지만 얼른 실물경기에 영향을 끼칠 정도는 아니라는 말이 덧붙었습니다. 자기들도 경기가 풀렸다는 게 얼마나 헛소리인지 아니까 그랬을 거야! , 암만 생각해도 78년의 인디애나보단 지금 우리나라 꼴이 더 개판인 것 같습니다만. 아무튼 착하게 사는 게 힘든 시대를 사는 착한 아저씨는 계속 착하기 위해 모험을 해야 합니다. 그게 앨버트 샘슨의 매력이지요.

 인디애나 블루스 때도 충분히 드러났지만 주인공 앨버트 샘슨은 정말 매력적입니다. 닳고 닳은 평범한 아저씨지만 자기가 생각하기에 아니다 싶으면 굳이 힘든 길을 선택하지요. 투덜거리고, 자기 합리화를 위한 각종 궤변을 중얼거리며 힘든 길을 뚜벅뚜벅 걷습니다. 이번 작품에서는 이 착하고 요령 나쁜 남자가 요령 나쁜 아버지의 모습을 드러내어 더욱 매력을 뽐냅니다. 딸인 샘도 아주 귀엽고 다른 등장인물들도 유쾌하여 읽는 맛이 넘치고 악역도 정말 얄미워서 만족스럽습니다. 예전에는 악역도 사실 착한 사람, 같은 것에 거부감이 별로 없었는데 요즘은 악역은 그냥 막 나빠야 좋더군요. 하긴 착하려면 그냥 착해야지 사실은 착해봐야 무슨 소용이겠어요.

 사건도 제법 구조가 탄탄합니다. 약간 과하게 단순한 감도 있어서 이른 시기에 전모가 다 드러나긴 합니다만 너무 꼬인 것보단 낫지요. 여기서 더 꼬였다면 아예 미스터리가 파탄났을 가능성이 보이기도 하고중반까지는 독자의 흥미를 잘 끌어낼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새삼 느낀 점은 주인공이란 남들이 이제 됐다고 말할 때 멈추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없는 길을 만들고 다니는 적극적인 주인공도, 남들이 떠밀어서 간신히 움직이는 소극적인 주인공도, 쭈쭈바나 빠는 게 어울릴 것 같은 어린 주인공도, 창문에서 뛰어내리는 것마저 기적으로 보일 정도로 늙은 주인공도 사건에 휘말리는 것은 자의가 아닐 지라도 행동을 멈출 때만큼은 자신이 정하곤 하지요. 비단 탐정이 등장하는 미스터리나 모험 활극이 아니더라도 일단 한 이야기의 주인공이라면 대개 자기가 가고 싶은 만큼 나아간 뒤에 멈춥니다. 죽어서 멈출 때도 있긴 합니다만서른을 훌쩍 넘은 아저씨가 되고 보니 문득 느끼게 되더군요. 나는 남에 의해서 그리고 나에 의해서 내가 바라는 만큼 가지 않고 멈추고 있다는 걸요. 개인의 삶은 하나하나가 모두 이야기일진데 내 이야기에서 나는 주인공처럼 굴지 않고 있구나, 발을 멈출 이유를 만들기 위해 발을 멈추고 있구나, 하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갱년기인가. 아저씨가 주인공인 소설을 읽으니 감상적이 되었나봐요. 나이는 뭐, 앨버트 샘슨에 비하면 제가 어리지만한참 어리지만!

 재미있는 소설입니다. 어차피 두 번째, 세 번째를 건너뛰고 번역된 시리즈 네 번째 작품이라 굳이 전작인 인디애나 블루스를 읽고 나서 읽을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이 소설을 읽고 마음에 들었다면 인디애나 블루스도 한 번 읽어보는 쪽이 더 괜찮을 것 같네요. 돈이 없고, 멍청하고, 운이 지지리도 없을 뿐이지만 실패자는 아닌 주인공이 나오는 소설이니 읽을 가치는 충분합니다.



덧글

  • 개발부장 2016/11/19 11:00 # 답글

    오오ㅡ 소개만 들어도 재미있어 보입니다. 말씀하신대로 하드보일드한 책들은 좀 보았었는데, 그 반대극이라니호기심이 생기네요.
    추천 감사합니다.
  • 정윤성 2016/11/19 20:50 #

    하드보일드와 결이 다르면서도 비슷한 재미가 있는 소설입니다. 재밌게 읽으셨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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