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을 나는 말, 밤의 매미 -일본


 ‘하늘을 나는 말’과 ‘밤의 매미’는 작가 ‘기타무라 가오루’의 ‘엔시 씨와 나 시리즈’ 그 첫 번째와 두 번째 소설입니다. 하늘을 나는 말은 기타무라 가오루의 데뷔작이자 지금은 당당히 미스터리 장르의 한 축이 된 일상 미스터리의 효시 격인 작품이지요. 일상 미스터리라는 장르를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와중에 마주한 사건을 다루는 이야기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크리스티 여사님의 미스 마플 시리즈까지, 사람이 죽지 않는 미스터리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조세핀 테이까지도 올라갈 수 있을 것 같지만 둘 다 “일상”이라는 단어를 붙이기에는 어색함이 좀 있지요. 그런 의미에서 엔시 씨와 나 시리즈는 일상이라는 단어와 정말 잘 어울립니다. 뭐, 90년대 초반의 일상이니 시대감이 좀 느껴지긴 하지만요. …제가 보기엔 앨런 포의 잃어버린 편지부터가 무지무지 일상 미스터리 느낌이라서. 형사 사건을 배경에 깔지만 사실 편지 찾는 것뿐인 내용이잖아요.

  엔시 씨와 나 시리즈는 현재 총 여섯 권이 출간되었으며 국내에는 하늘을 나는 말과 밤의 매미 두 권이 번역되었습니다. 나머지 4권의 제목은 아래와 같습니다.


 - 秋の花(가을 꽃) : 1991년 2월, 시리즈 첫 장편 작품

 - 六の宮の姫君(로쿠노미야 공주) : 1992년 4월, 장편,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단편인 로쿠노미야 공주의 창작 의도를 좇는 내용이라는군요.

 - 朝霧(아침 안개) : 1998년 4월, 시리즈의 출간 텀이 확 길어지네요.

 - 太宰治の辞書(다자이 오사무의 사전) : 2015년 3월, 무려 18년만의 신작!


 제가 신이라면 계율이라도 하나 만들겠어요.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 하지 말라, 시리즈를 10년 넘게 멈춰놓지 말라, 쓰기 싫으면 일단 완결이라도 시켜 놔라, 목 빠지게 기다리는 독자들을 잊지 말라, 나 이외의 다른 신을 섬겨도 되고 무신론자가 되어도 된다, 같은 걸로요.

 국문과를 다니는 ‘나’는 우연한 기회에 라쿠고가인 ‘슌오테 엔시’와 알게 됩니다. 라쿠고를 좋아해서 엔시 씨를 잘 알던 나는 엔시 씨와의 만남을 통해 그가 뛰어난 예능인일 뿐 아니라 엄청난 실력의 탐정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지요. 그 날 이후부터 나는 일상에서 마주치는 크고 작은 사건들을 주섬주섬 그러모아 엔시 씨 앞에 펼쳐놓는 나날을 보냅니다.


 하늘을 나는 말

  - 오리베의 망령 : 교수님이 옛날에 꿨던 기묘한 꿈의 비밀을 파헤치는 이야기.

  - 설탕 합전 : 홍차에 설탕을 너무 많이 넣으면 다른 사람의 눈에 띈다는 이야기.

  - 호두 껍데기 안의 새 : 현재 8개월 된 조카를 돌보고 있는 내가 읽기엔 좀 슬픈 이야기.

  - 빨간 모자 : 여자가 무섭고 남자는 한심한 이야기.

  - 하늘을 나는 말 : 결혼하고 싶어지는 이야기.


 밤의 매미

  - 으스름달밤 : 책 도둑도 도둑놈인 이야기.

  - 6월의 신부 : 나 같았으면 애초에 ‘나’를 왜 데려간 거냐고 따졌겠지만 그러지 않으니까 주인공이겠지, 싶은 이야기.

  - 밤의 매미 : 여자가 정말 무섭고 남자는 정말 한심한 이야기.


  …뭔가 이상한 것 같은 요약입니다만 틀린 부분은 별로 없습니다. 그나저나 정말 재밌게 읽었어요. 큰 기대는 없었는데 아주 괜찮네요. 일상 미스터리의 고전답게 기본이 잘 갖춰져 있어 현재 난립 중인 일상 미스터리의 탈을 쓴 특이한 직업 겉핥기와는 격이 다른 즐거움이 있습니다. 감수성 기억법 예찬론자인 만능감정사, 불량학생 출신 화과자 장인, 리먼브라더스 다녔던 카페 주인 등등은 저기 구석에 가서 이 시리즈를 읽으며 반성하라고 말하고 싶어요. 시오리코 씨는 가지마세요.

  하늘을 나는 말과 밤의 매미는 일상 미스터리로써 완전히 정제되어 있지 않은 점이 눈에 보이는데 그 부분이 좋습니다. 일상이 이야기에서 상당히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추리의 기반이 되기 위해 소모되는 경우가 거의 없으며 일상과 추리 사이의 얼개가 단단할 때도 있지만 대단히 느슨할 때도 있다는 여유가 근사해요. 추리소설에서 추리의 대전제는 우선 논리적으로 말이 되는 것 같이 보여야 한다, 에 있다 보니 타이트한 강박이 이야기를 옥죄는 경우가 많은데 이 시리즈는 그러한 긴장이 없어서 무척 편하지요. 허나 마냥 편하지만 않다는 점이 또 뛰어납니다. 일상과 추리로 건너가는 형식의 지닌 이 이야기는 달달한 일상을 달달한 추리로 이을 때도 있고 달달한 일상을 씁쓸한 추리로 뒤집을 때도 있으며 씁쓸한 일상을 달달하게 마무리할 때도 있고 씁쓸한 일상을 더욱 쓰게 끊을 때도 있습니다. 물론 달고 쓰지 않은 덤덤함이 이야기를 감싸는 때도 있지요. 복잡단순한 맛이 책 안 가득 담겨 있어 지루할 틈이 없습니다. 아주 풍부해요.

  추리의 완성도 자체는 그리 높다고 할 순 없네요. 엔시 씨, 그건 좀 애매하네요… 싶은 추리가 몇몇 있기는 해요. 일상 미스터리라는 장르를 골랐으니까 이 정도는 이해할까, 정도로 넘기는 여유를 갖출 필요가 있겠습니다.

  캐릭터 자체는 평범합니다만 캐릭터끼리 맺어가는 관계의 흐름은 무척 빼어납니다. 나와 엔시 씨 사이에 흐르는 동경, 친애, 우정, 사랑 등이 자연스럽게 느껴지면서도 고이지 않고 부드럽게 지나가는 과정이 즐거워요. 나와 친구 쇼코, 에미 사이의 우애도 보기 좋고요. 특히 주변의 인물들과 사건들을 접하며 조금씩 성장하는 주인공 ‘나’가 정말 사랑스러워요. 이 소설의 주요 인물들은 다 매력적이군요.

  국문학도 주인공이 구사하는 개성적인 표현들을 읽는 재미도 근사합니다. 커플이 눈앞에서 꽁냥대는 모습을 천의무봉하다고 말하는 부분에선 미소를 지울 수가 없었어요.

  음, 오랜만에 칭찬만 잔뜩 적은 기분입니다. 칭찬하지 않을 도리가 없는 소설이었어요. 그런 의미에서 얼른 시리즈 다음 작품을 출간하는 게 어떨는지요. 빨리 읽고 싶어서 현기증이 난단 말이에요.




덧글

  • 방울토마토 2017/08/23 07:51 # 답글

    정말 무난하게 좋은 작품이었습니다.
    미스터리에 관심없던 사람이 입문용으로 보면 좋을 내용.
    그러고보니 비블리아 고서당 7권이 국내에도 나왔더군요.
    시리즈가 안나오면 답답해서 싫지만 잘보던게 끝나면...
  • 정윤성 2017/08/23 21:40 #

    흠잡을 곳 없이 사랑스럽지요. 말씀대로 미스터리라고 하면 사람이 죽고 그러는 것 뿐이라는 인식을 가진 분들에게 추천하고 싶습니다.
    7권이 나와버렸군요... 하아, 시오리코 씨...
  • watermoon 2017/08/23 09:08 # 답글

    오랜만에 오셨네요 반갑습니다 ㅎㅎㅎ
    저두 화과자 장인이나 만능감정사 그리고 시계수리사나 바리스타가 펼치는 일상미스터리는 별로였어요 시오리코씨랑 미호시 바리스타는 빼구요 ㅎㅎㅎ 하늘을 나는 말이랑 밤의 매미는 읽고싶았는데 도서관에 들어와 보니 역시 좋더군요 저 이 작가의 스킵 턴 리셋 이렇게 타임워프물 시리즈도 정말 재밌게 읽었거든요
  • 정윤성 2017/08/23 21:43 #

    저도 반가워요! 물론 미호시 씨도 빼야죠. 하지만 빠질 사람보다 빠지지 말아야 할 사람의 수가 점점 늘어만 가는 것 같아 불안하기 짝이 없습니다...
    스킵, 턴, 리셋은 저도 재미있게 봤어요. 그간 읽었던 타임워프물들은 다들 막 세계를 구하고 어쩌고 이랬는데 전혀 다른 방향으로도 너무 재밌어서 깜짝 놀랐지요.
  • watermoon 2017/08/23 09:10 # 답글

    그런데 항상 느끼지만 이 작가 아저씨 진짜 생긴건 수다분한 아저씨인데 여성 그것도 발랄하고 귀엽고 새침한 아가씨 묘사를 어쩌면 저렇게 잘하는지 모르겠어요 처음에 얼굴을 공개안했을때 여대생 작가라는 소문이 퍼졌던 게 납득이 가요
  • 정윤성 2017/08/23 21:45 #

    저도 작가 분이 아저씨라는 건 알고 있었는데 이번 감상문 쓰면서 얼굴은 처음 봤어요. 정말 표준적인 아저씨 생김새더군요. 강한 동질감이 느껴져서 좀 슬프기도... 문장을 읽다보면 왜 여대생 작가일 거라 생각했는지 잘 알겠더군요. 어쩜 그렇게 귀여움이 넘치는지. 아저씨 외모의 내면에 정말 여대생이 자리잡고 있을 지도 모르겠어요.
  • 아침 2017/08/25 21:22 # 답글

    시오리코씨는 가지마세요에서 터졌습니다. 가지 말아야 할 애들에 요네자와 작품 시리즈도 포함시켜 주세요!

    아 그러고 보니 고전부 신간 국내 발매되었더군요. '이제와서 날개라고 해도'입니다 이번엔 단편집 같은데 주문 대기 중입니다.ㅇㅅㅇb

    그나저나 본문의 작가가 남자였다니 충격이 크군요.. 아니 카오루란 이름이 남녀 모두 쓰긴 해도 남자 쪽 이름으로 더 많이 쓰긴 하지만 이전에 다른 작품 읽었을 때 당연하게 여자일거라 생각했던지라..--)
  • 정윤성 2017/08/26 22:06 #

    호타로도 고바토도 다 가면 안 되죠! 그래도 그 아이들은 눈치가 있지만 시오리코 씨는 다른 사람들 다 구석 갈 때 슬금슬금 따라 갈 것 같아서... 흑흑 시오리코 씨가 완결이 나버렸어ㅜㅜ
    시오리코 씨(더 이상 비블리아 고서당이라고 부르지도 않는 중) 완결편이 나온 건 알았는데 고전부 신간도 나왔군요. 신난다! 얼른 읽고 싶어요!
    저도 기타무라 가오루가 남자라는 건 왜인지 미리 알고 있었지만 사진을 보고는 무례하게도 와, 이렇게까지 아저씨였을 줄이야...라고 생각해버렸습니다. 기타무라 선생님 죄송합니다... 작가는 세간에서 본인을 여대생으로 여길 때 어떤 마음이 들었을까요? 귀여움이 넘치는 문장을 읽고 있자니 의외로 꽤 즐겼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하게 됩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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