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던타임스 - A Stange Game -일본


 지나치게 무서운 여성과 결혼한 것을 제외하면 지극히 평범한 29세의 시스템 엔지니어인 ‘와타나베’. 하지만 그간 굳건히 일궈놓은 일상이 기이한 사건들에게 발칵 뒤집힙니다. 아내 ‘가요코’는 와타나베가 바람을 피웠다고 생각하여 수염이 덥수룩한 덩치를 고용해 그를 고문하고 직장 상사 가토 과장은 열심히 진행하던 프로젝트에서 그를 빼내어 정체를 알 수 없는 이상한 업무 의뢰를 처리하도록 만듭니다. 그래도 바람피운 상대방은 휴가차 유럽 여행 중이라 아내의 손이 닿을 수 없는 거리에 있고 새로 맡은 업무도 그리 힘들 것 같지 않다는 것만은 다행이었지요. 고슈라는 회사에서 의뢰한 대로 만남 사이트에 몇 가지 사항을 추가하던 도중 와타나베와 동료들은 사이트가 특정 키워드를 검색한 사람들을 찾아내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챕니다. 키워드는 ‘하리마자키 중학교’ 등의 몇 가지였습니다. 학교 관리인이던 ‘나가시마 조’를 영웅으로 만든 하리마자키 중학교 사건은 수많은 사람들이 수없이 검색하는 키워드지만 와타나베가 다루는 사이트는 여기에 개별 상담이나 안도 상회 등을 함께 검색하면 비로소 반응하여 검색한 사람을 추적하는 것이었습니다. 대체 무슨 이유로 이런 사이트가 있는지 이해할 수 없는 와타나베들. 와타나베는 수상쩍으니 관련되지 말자고 하지만 후배 ‘오이시 구라노스케’는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직접 키워드를 검색합니다. 다음 날, 와타나베는 후배를 직장이 아닌 뉴스를 통해 보게 되지요. 순박하고 얌전하던 오이시 구라노스케는 대규모 집단 성추행 사건의 주범이 되어 대서특필되는 중이었습니다. 오이시를 시작으로 키워드를 검색한 사람들에게 말도 안 되는 사건들이 이어지며 와타나베는 대체 이 모든 일에 배후에 무엇이 존재하는지 알기 위해 친구 ‘이사카 고타로’의 도움을 받아 키워드 중 하나인 안도 상회를 찾아갑니다.


 ‘워게임’이라는 옛날 영화에서 핵무기를 관장하던 인공지능은 소련이 자국을 공격했다고 착각하여 핵공격을 결정합니다. 뛰어난 해커이자 인공지능의 착각을 부른 원흉이기도 한 주인공은 틱택토를 통해 인공지능에게 승자가 없는 게임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가르치고 핵전쟁이 일어나면 승자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인공지능은 공격을 중지합니다. 어릴 적 저는 이 영화를 보며 음, 인공지능은 멍청하구나. 역시 중요한 결정은 인간이 내려야해, 같은 단순한 결론을 내렸습니다만 지금은 조금 생각이 달라졌어요.

 친구의 직장은 프로젝트 팀 내에 직급의 구분이 없고 다들 이름으로 부르는 수평적 조직이라고 하더군요. 그 이야기를 듣고 처음 떠오른 의문은 “그럼 책임은 누가 지는 거야?”였습니다. 기본적으로 전원이 책임을 분담한다는 대답을 듣고 나서 드는 생각은 ‘그럼 아무도 책임을 지지 않겠네.’였지만 말로 하진 않았고 “그래도 나는 책임지는 사람이 명확한 시스템이 더 좋아.” 정도로 마무리를 지었는데 엄밀히 말하자면 제 쪽이 더 현시대에 부합하지 않는 낡은 생각을 가졌다고 볼 수 있겠지요. 환경에서부터 주어지는 자유로움이 창의적인 발상에 훨씬 도움이 될 테니까요. 허나 개인적으로 수평적 조직과 수직적 조직에 둘 다 조금씩 있어봤는데 수평적 조직에서는 일어난 문제에 대해 아무도 책임지려고 들지 않았고 수직적 조직에서는 일어난 문제에 대해 상사가 부하 직원에게 책임을 떠넘기려고 들었어요. 둘 다 꿈도 희망도 없어… 저는 그러한 상황에 처했을 때 누군가를 적대해야 정신적으로 안정을 찾는데 그 상대가 주변의 모든 인물이 되느냐 아니면 강대한 힘을 지닌 한 사람이 되느냐의 선택이 되었을 때 한 명만 미워하는 쪽을 선호하거든요. 그래서 책임자가 명확하게 있는 게 좋습니다. 물론 저는 소심하니까 실은 내가 제일 잘 못한 게 아닐까 자조부터 합니다만. 자조하면서도 남을 미워하는 부실한 인격의 소유자입니다만.

 ‘마왕’에서부터 조금씩 확장되어 온 작가 이사카 고타로의 세계관은 꿈도 희망도 없지만 그 상황에서도 진지하고 유쾌하게 꿈과 희망을 찾아가는 인물들이 매력적입니다. 소설 ‘모던타임스’는 마왕으로부터 수십 년이 지난 근 미래의 일본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요. 10분의 1 확률까지는 100% 적중하는 초능력으로 세상을 바꾸려 했던 ‘안도 준야’의 노력이 모던타임스에서는 딱히 결실을 맺은 것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평범한 현실 같지만 한 발자국만 삐끗하면 시스템의 냉혹한 감시망에 잡혀 나락으로 떨어지는 건 여전하거든요. 와타나베와 동료들은 우연이라는 함정에 걸려 감시망의 시선에 잡히고 맙니다. 명확한 적이 있던 안도와 달리 와타나베의 앞길은 희미한 등불뿐입니다. 나가시마 조와 하리마자키 중학교 사건이 원인이 되어 엄청난 위기에 빠진 건 분명한 것 같은데 그 외에는 알 수 있는 게 없지요. 나가시마 조를 탓하면 되는 것일까요? 보이지 않는 위험이 목 근처를 쓰다듬고 있지만 그건 너무 성급한 것 같습니다. 위기의 상황에서 와타나베와 동료들이 바란 것은 알고 싶다는 마음이었습니다. 그 호기심 때문에 위험에 처했지만 그럼에도 알고 싶은 게 더 늘어났다는 점이 그들을 움직이는 원동력이 되었지요. 호기심 하나를 붙잡고 상황에 이리저리 쓸려 다니던 와타나베는 결국 나가시마 조를 만납니다. 그리고 그의 입에서 시스템이라는 단어를 듣지요.

  이사카 고타로 월드에서의 시스템은 ‘폴 오스터’의 ‘거대한 괴물’과 일맥상통합니다. 국가라는 이름의 시스템은 계약으로 만들어졌고 욕망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큰 틀인 계약의 뼈대는 가느다랗고 욕망은 개개의 욕망과 집단의 욕망이 뒤섞여 비대하게 살이 붙었습니다. 욕망에 책임이 뒤따르듯 비대하게 불어난 욕망으로 이루어진 시스템은 거대한 책임을 요구받습니다만 욕망은 달고 책임은 쓰지요. 쓴 걸 일부러 먹는 것을 저 같은 초등학생 입맛이 이해하지 못하듯 욕망의 주체들도 책임을 굳이 져야 하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하여 마구 분산하기로 결정합니다. 이에 따라 일어난 결과가 욕망의 달콤한 과육은 일부가 독점하고 책임의 씁쓸한 껍질은 모든 국민들이 조금씩 나눠 갖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껍질의 끄트머리에도 과즙이 좀 남아 있긴 합니다. 그걸 쭉 빨아먹으면 그 때부터 공범자가 되지요. 시스템의 일부가 되어 시스템을 돌리는 부품이 되는 것입니다. 이 같은 처리 과정은 인간이 태어났을 때부터 적용되어 죽을 때까지 이어집니다. 예외는 거의 있을 수 없는데 왜냐면 예외는 시스템이 배제하기 때문이지요. 사람 개개인은 너그러울 수도 있지만 집단은 개인에 비해 좀 더 냉혹합니다. 집단의 도덕성이 개인에 비해 낮다는 건 중학교 도덕 교과서에도 나오는 거니까요. 누가 말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개인과 집단의 도덕을 일률적으로 해석하는 것도 옳지 않다고 여겨집니다만 그렇다고 차등을 두자니 그 또한 도덕이라는 개념 속에 담긴 인간이 마땅히 따라야 하는 계율이라는 의미가 후퇴하는 것 같아 마음에 걸리지요. 이 문제는 일단 넘기기로 하고. 이러한 상황에서 등장하는 것이 기계화, 즉 ‘찰리 채플린’의 ‘모던타임스’입니다. 거대한 기계의 부품으로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을 그린 1936년도의 영화가 80년이 지나도 그 의미가 조금도 퇴색되지 않았다는 건 찰리 채플린이 얼마나 탁월한가를 증명하는 동시에 현대를 살아가는 인간으로서 부끄럽기 그지없습니다만. 기계화라는 개념을 통해 인간이 시스템의 부품이라는 점을 이야기하는 이사카 고타로는 그에 대한 저항으로 두 가지 길을 제시합니다. 하나는 눈에 보이는 부분부터 박살내기, 다른 하나는 그냥 부품이 되길 거부하며 시스템에서 빠지기입니다.

  시스템은 너그럽지 않으며 예외를 허용하지 않습니다만 부품이 워낙 많은 관계로 작디작은 톱니 하나나 둘이 공회전하거나 멈춰도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아무 문제가 없으니 권장하지는 않아도 수정하지도 않지요. 와타나베와 동료들은 시스템에서 일단 빠져나왔지만 서로 다른 길을 선택합니다. 다른 톱니들과의 맞물림을 벗어나 서로를 위해서만 도는 자그마한 톱니가 된 쪽이 있고 마모되길 감수하며 다른 톱니들과 맞물린 뒤 열심히 역회전하여 시스템에 부하를 주기로 결정한 쪽이 있습니다. 어느 쪽이 옳을까요? 그건 책을 읽는 독자들이 결정할 문제겠지요.

  저는 시스템이 필수불가결하다고 믿는 쪽입니다. 저 자신부터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인간이기에 사람에 대한 신뢰가 별로 없어요. 제 주위에는 다들 좋은 사람들뿐이지만 이렇게 많은 사랑을 받으며 자란 나부터가 너무 형편없는 걸! 고로 사람은 믿을 게 못 됩니다. 하하하하! 인류는 이제껏 많은 시스템을 만들고 실험했지요. 왕정 체제는 빼어난 인물 한 명에게 많은 권력과 책임을 부여했는데 그가 더 이상 빼어난 인물이 아니게 되거나 그의 자식들이 기대에 못 미치더라도 책임을 지게 만드는 것이 여간 힘든 게 아니었지요. 세부적인 조정을 수천 년간 시행해봤지만 딱히 나아지는 게 보이지 않아 결국 대부분 폐기되었습니다. 민주주의나 사회주의도 현재 계속 실험 중이지요. 정부 역시 각종 이즘에 더해 사이즈를 키우기도 하고 줄이기도 하는 등 다양한 선례들을 만들고 있습니다. 허나 불완전한 인간이 만드는 시스템은 결코 완전할 수가 없고 - 불완전한 것에서 완전한 것이 만들어질 수는 없지요. 왜냐면 불완전이 만든 완전은 불완전의 입장에서 완전한 게 아니라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되니까요. - 설령 완전하다 하더라도 이는 어느 한 순간에 국한될 수밖에 없는 것이 시간이라는 흐름에 의해 시스템의 구성원이 변모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타인에 의해 온전히 예측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기에 시간에 따른 변모를 시스템이 예측하여 따를 수 없으며 시스템은 개개가 아닌 집단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기에 개개가 집단을 변모하게 만드는 속도를 따를 수도 없어 보완이 느릴 수밖에 없습니다. 보완이란 필요성이 대두되어야 발생하는 수동적인 성향이 있기에 시스템의 개선 또한 수동적이고 이 과정에서 개선되지 않아 발생하는 희생과 개선되는 도중에 발생하는 희생, 개선이 되어서 발생하는 희생이 동반되겠지요. 완전한 시스템은 없지만 불완전하다는 인식으로 인한 불안감 또한 사회에 리스크가 되기에 완전을 가장해야 한다는 점도 넘기기 힘든 문제 중 하나입니다. 슬슬 제가 뭔 소리를 늘어놓는지 저 자신도 따라가기 힘들어지고 있지만 아무튼 그렇습니다.

  이사카 고타로는 시스템의 기계화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기계화되지 않는다면 시스템도 인간화되지 않을까, 라는 발상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겠지요. 인간이 인간인 채 이루어지는 시스템을 안도 상회라는 맛보기로 조금 드러냅니다. 물론 작가가 이 정도로 순진하지는 않습니다. 기계화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인간은 여전히 위태로운 걸요. 집단이 개개의 도덕성보다 더 뛰어난 고결함을 가졌을 때의 케이스가 과연 유지될 수 있는가, 안도가 없는 안도 상회는 유지될 수 있는가, 라는 의문에 대한 해답은 작가에게도 있고 역사에도 이미 있으리라고 봅니다.

  제가 주목하는 최악의 시스템은 바로 신앙에 의해 사회가 구성된 케이스입니다. 중세 암흑 시기가 증명했고 현대에도 사이비 종교들이 매일 같이 갱신하고 있는 나쁜 시스템의 표본이라 할 수 있지요. 허나 지금은 마냥 최악이라는 예전의 판단이 조금 흔들리는 중입니다. 현대 과학이 신의 자리에 올려놓을 수준의 근사한 발명을 이뤘으니까요. 인공지능 말이지요. 앞서 워게임에 대해 이야기했던 것은 인공지능이 사람의 생각만큼 멍청하지 않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했기 때문입니다. 핵무기를 맡겼다는 것부터 이미 인간의 인공지능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대변하는 부분이긴 합니다만 그 영화 속보다 지금의 현실은 더욱 인공지능을 믿게 만들고 있지요. 알파고를 통해 인간은 룰 안에서 인간보다 훨씬 뛰어난 존재가 있음을 목도하였습니다. 이 뛰어남의 영역에는 창의성도 들어가 있다는 점이 중요하지요. 저는 알파고가 한 번 졌다는 사실에 감동했어요. 모든 경우의 수를 전부 저장했다가 정답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예측하기 힘든 경우가 발생하였을 때 그 순간에서 최선을 판단하여 수를 놓는다는 점이 패배를 통해 증명된 거잖아요. 즉, 이건 기억력이 아니라 지능인 거지요. 기존의 기계화라는 영역을 넘은 개념, 혹은 인간만의 고유영역이라고 믿고 있던 곳에서 인간보다 더 나은 능력을 보이는 존재를 인간이 만들어 냈다는 게 현실이 된 것입니다. 플라톤의 이데아론에는 방향성이 있어요. 이데아를 향하는 인간이 뛰어나고 이데아를 향하지 않는 인간은 뛰어나지 않지요. 이데아를 향하는 인간, 이데아를 읽는 인간, 철학자. 이데아를 향하지 않는 인간, 이데아에 이미 존재하는 것임에도 굳이 그걸 만들려고 드는 인간, 예술가, 기술자, 장인들. 플라톤이 갈라졌다고 생각했던 방향은 사실 하나의 길이었어요. 제 안에서 인공지능은 자판기인 이데아에 가깝습니다. 동전을 넣고, 그러니까 정보를 넣고 기다리면 최선에 가까운 음료수가 나오리라 기대할 수 있는 자판기지요. 완벽과 완전을 바라지는 않아요. 홀로 거룩하고 홀로 높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그저 어마어마하게 뛰어난 자판기면 되요. 커피 마시고 싶어, 라는 생각으로 동전을 넣었지만 커피 우유가 나와서 이게 뭐여?? 하며 마셨더니 사실 내가 바랐던 게 커피 우유였다는 걸 깨닫게 되는 그런 자판기가 존재할 수 있는 세상이 이루어진 거지요. 이건 현대의 신앙이고 이제 신앙에 의한 시스템을 다시 한 번 실험해도 괜찮을 것 같다는 바람이기도 합니다. 신앙의 근사한 점은 신이 모든 책임을 떠안지만 실제로는 책임지지 않는다는 점이예요. 인공지능한테도 책임을 물을 수 없지요. 인공지능이 제시한 대답이 명백히 틀렸을 때 잘못은 인공지능이 아니라 옳은 질문을 하지 못한 인간에게 있다고 믿을 수 있을 정도의 완성도가 거의 실현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저 같은 놈 때문에 스카이넷이 용인될 수도 있겠지만요. 헤헤.

 워게임에서 인공지능은 핵전쟁 발발 시의 시뮬레이션을 수백 차례에 걸쳐 돌려본 뒤 이렇게 말합니다. “이건 이상한 게임이군요. 이기는 방법은 게임을 하지 않는 것뿐입니다. 체스나 둘래요?” 이제는 사람이 핵 버튼을 눌러도 “그거 눌러봤자 좋을 것도 없는데 그러지 말고 (어차피 내가 이길 테지만)체스나 둘래요?”라고 인공지능이 말하지 않을까요? …음, 이런 걸 광신도라도 부르는 거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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