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그녀의 머리 없는 시체, 모두가 나에게 탐정을 하라고 해 -일본


 날이 많이 덥네요. 세상 살아갈 기운도 없고 의욕도 없어서 책이나 읽자 마음을 먹고 미루고 미루던 도불의 연회를 드디어 다 읽었습니다. 도불의 연회 상편인 연회의 준비를 거의 출간되자마자 읽었었는데 1년 뒤에 나온 후속편인 연회의 시말 첫 페이지를 딱 읽으니 앞의 내용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도 꾸역꾸역 연회의 시말 상권을 다 읽었는데 정말 아무 의미도 없는 행위처럼 느껴져서 때려치우고 그대로 반납을 했지요. 허나 무언가 부채의식 같은 게 남았던지 다시 읽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저를 좀먹기 시작했고 몇 번씩 연회의 준비를 빌렸다가 읽었던 걸 또 읽기 싫어서 고스란히 반납하고 얼마 뒤에 또 빌리고 반납하길 반복한 끝에 그냥 읽고 치우자는 마음이 올라와 간신히 다 읽을 수 있었습니다. 책도 그렇고 드라마도 그렇고 영화도 그렇고 앞서 본 내용이 기억 안 날 때의 짜증은 정말 이루 말할 수가 없어요.

 도불의 연회 읽은 이야기를 쓰긴 했지만 그건 기대만큼 재미있지도 않고 스토리를 요약 ‧ 정리할 엄두가 안 나니까 넘어가고 대신 짧고 읽기 쉬웠던 ‘시라이시 가오루’ 작가의 ‘나와 그녀의 머리 없는 시체’와 ‘모두가 나에게 탐정을 하라고 해’에 대한 감상이나 적으려고 합니다. 작가 시라이시 가오루는 1969년 생으로 2000년에 ‘위를 향하여―격투소녀 스즈(上を向こうよ―格闘少女スズ)’로 제 5회 스니커즈 대상 장려상을 받으며 라이트노벨 작가 데뷔를 하였으며 이후 2004년부터 ‘후쿠다 마사오’라는 이름으로 ‘영주님이 온다!(殿がくる!)’를 써서 제 3회 슈퍼 대시 소설 신인상 가작을 수상하여 다시 데뷔합니다. 영주님이 온다! 는 오다 노부나가가 어째서인지 400년 뒤인 현재로 왔다는 이야기라고 하네요. 이후 2009년 나와 그녀의 머리 없는 시체로 제 29회 요코미조 세이시 미스터리 대상 우수상을 받으며 미스터리 작가로 또 데뷔하지요. 뭘까요, 이 경력은. 상 하나는 잘 탑니다만 상을 받은 이후에는 이렇다 할 게 없습니다. 영주님이 온다! 는 전 3권으로 완결을 냈지만 2000년에 데뷔한 라이트노벨 작가이면서 쓴 단행본의 수가 총 7권에 지나지 않는다는 건 약간… 어쩌면 다른 이름으로 또 데뷔했을 지도 모르겠네요.



 주인공 시라이시 가오루는 어느 여성의 머리를 시부야 한복판인 하치공 동상 발치에 놓아둡니다. 시라이시가 떠난 뒤 곧장 발견된 머리는 곧장 매스컴 등을 통해 엽기적이고 반사회적인 사건으로 널리 알려지지요. 여성의 몸은 여전히 시라이시의 집 냉장고 속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시라이시는 평소처럼 회사에 다니면서 사건의 추이를 유심히 살피지만 경찰은 시라이시 본인을 찾아내기는커녕 여성의 신원 파악조차 애를 먹어 수사는 영 지지부진한 것 같습니다. 허나 이내 정체를 알 수 없는 누군가로부터 여자 머리를 놓아둔 게 너라는 걸 알고 있다는 전화가 걸려오고 비록 다른 사건 때문이지만 형사가 집으로 찾아오며 누군가 몰래 침입하여 보관하던 여자의 손가락을 잘라 시부야의 광장에 놓아두는 등 사건은 점점 속력을 내며 시라이시 쪽으로 달려옵니다. 그 와중에 시라이시는 회사에서 업무적으로 각종 기행을 벌이고 자기도 모르게 여자 상사를 유혹하는 등 마치 시마 사원인양 행동하여 주위의 이목을 끕니다. 시라이시는 왜 여성의 머리를 시부야에 전시하듯 놓아둔 것일까요? 머리가 잘린 여성은 대체 누구였던 걸까요? 게다가 시라이시에게 협박 전화를 하고 여성의 손가락을 자른 사람은 누구일까요? 작가는 왜 데뷔만 세 번이나 한 것일까요? 작가가 쓴 소설 중 데뷔작들을 빼면 딱 한 권만 남는다는 사실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심지어 미스터리 작가 데뷔작인 이 시라이시 가오루 시리즈도 2013년에 나온 모두가 나에게 탐정을 하라고 해, 를 끝으로 더 이상 나오지 않고 있다는 사실은 또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요? 작가가 아픈 걸까요? 그렇다면 이해가 가니까 만약 정말로 몸이 아프시다면 다른 이름으로 또 데뷔한 게 아닐까 하는 식의 말을 한 걸 사과하겠습니다. 미안해요. 이상 나와 그녀의 머리 없는 시체의 스토리 요약을 마칩니다. 끝.



 모두가 나에게 탐정을 하라고 해, 라는 제목에 끌려 책을 읽었습니다만 재미는 나와 그녀의 머리 없는 시체 쪽이 더 낫습니다. 장르소설의 관점에서 볼 때는 굉장히 애매하고 완성도가 높다고 할 수 없는 수준입니다만 독특한 매력이 있어서 꽤 끌리는 작품입니다. 단편집인 모두가 나에게 탐정을 하라고 해 쪽은 앞서 보여줬던 개성이 많이 줄어들어서 아쉬웠고 추리 쪽도 좀 설득력이 부족했어요.

 나와 그녀의 머리 없는 시체가 가진 장점은 중2병을 이상한 형태로 졸업한 듯 보이는 주인공과 추리와 회사원이라는 장르의 오묘한 융합에 있습니다. 중2병을 사춘기 특유의 근거 없는 자신감과 그에 따른 현실 인식이 현실 세계와의 사이에서 괴리가 생겨 외적 자극을 통해 생겨난 내적 망상의 세계로 도피를 하려다가 제대로 안 돼서 환자가 덜떨어지게 행동하는 것처럼 보이는 증상(제 발병 체험을 통한 정의)이라고 본다면 주인공 시라이시 가오루는 중2병을 벗어나긴 한 것으로 사료됩니다. 다만 그 과정에서 투여된 백신이 부족했던 것인지 사회성의 일부가 결락되고 자아와 타아를 바라보는 관점이 뒤틀린 채로 유지되어 자라나 우정도 사랑도 업무도 다 자기가 내린 정의에 기반하여 판단하는, 좋게 보면 개성이 존중받으며 자랐다고 할 수 있고 나쁘게 보면 사회화가 덜 된 채 현실로 나왔다고 할 수 있는 자세를 견지합니다. 만약 시라이시 가오루가 작중 대기업인 요츠비시(맞나? 미츠비시를 패러디한 건 분명한데) 종합 상사에 다닌다고 하지 않고 다른 탐정들처럼 백수나 반백수였다면 캐릭터성이 잘 살아나지 않았을 것 같은데 대기업 사원이라 독자가 가진 선입견과 합치되기도 하고 배치되기도 하면서 묘한 매력을 발산합니다. 조연들도 비상식적인 주인공과 웅탕웅탕거리면서 근사한 시너지를 보여주지요. 이 소설의 다른 장점은 회사원의 일대기가 난데없이 펼쳐진다는 점입니다. 여자 머리를 잘라서 시부야에 갖다놓고 인터넷을 뒤져가며 자신이 벌인 일에 대한 여론이나 경찰의 수사 과정을 좇던 시라이시는 아침이 되면 회사원으로 변신합니다. 시라이시는 종합 상사의 사원이니까 뭐든 해야 한다고 구시렁거리며 회의에 참여하여 상사를 제치고 참신한 아이디어를 내거나 과감한 판단으로 클라이언트를 만족시키는 등 회사 생활을 열심히 합니다. 이러한 대목에서 소설은 미스터리가 아니라 시마 코사쿠의 사원 시절 일대기 같은 분위기로 변모하지요. 자기보다 권력이 센 여성을 꼬시는 것까지 시마와 닮았습니다. 이 잘나가는 회사원의 일대기는 어디서 본 것 같은 식상한 에피소드들로 짜여 있지만 회사 생활이라는 자체가 미스터리와 결합하기에는 충분히 신선하기에 꽤 재미있어요.

 다만 캐릭터를 제외하면 앞서 이야기했지만 완성도가 높지 않습니다. 미스터리로 봐도, 회사원의 일대기로 봐도 어느 하나 뛰어나다고 할 수가 없어요. 제 아무리 주인공이 참신한 인물상을 보인다 하더라도 미스터리에서 범인도 트릭도 동기도 결말도 전부 예측 범위 내라는 점은 아쉽지요. 회사 생활의 에피소드들도 다 어딘가에서 보고 들었던 일종의 무용담을 휙휙 꿰어 맞춘 정도라 완성도를 운운할 정도도 되지 않습니다. 주인공의 회사 생활은 결국 시라이시는 회사 내 계급에 얽매이지 않아, 시라이시는 아이디어가 참신해, 시라이시는 그릇이 커 같은 이야기의 반복이라 한 권에 한 번씩 승진이라도 하지 않는 이상 한계가 명백합니다. 실제로 후속작에서는 회사원 탐정이 되라는 권유를 받아서 아예 회사 일을 하지 않지요.



 근사한 장점을 가진 소설입니다만 단점을 이길 정도는 아닙니다. 미스터리 문학상에서 신인상을 받을 정도의 재미를 갖추고 있지만 중견 작가에게 주는 상을 수상할 수준은 되지 않습니다. 중2병이 변칙으로 진화한 캐릭터를 좋아하시는 분들이나 세상이 주인공을 중심으로 짜인 구성을 즐기는 분들, 장르적 참신함을 좋아하시는 분들은 가볍게 읽기 좋겠습니다만 그 외에는 추천하지 않습니다.





덧글

  • 방울토마토 2018/08/04 09:26 # 답글

    볼까말까 고민했는데 이글보고 결정했습니다.
  • 정윤성 2018/08/04 19:32 #

    방울토마토님의 판단에 도움이 된 것 같아 기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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