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장의 살인 -일본


  읽는 동안은 재미있는데 다 읽고 나니 뭔가 이상한 구석이 많았다는 느낌이 드는 책들이 꽤 있지요. 볼 때는 재미있었는데 돌이켜 생각하니 완성도 면에서 문제가 있었던 것 같다, 라는 마음이 드는 작품들을 비단 책 말고도 영화나 드라마 등으로 꽤 경험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예전에는 이런 작품들을 보고 난 뒤 열기가 빠졌을 때의 마음 쪽을 보다 이성적이라 여겨 형편없었다, 라고 평가하곤 했는데 요 몇 년 사이에 생각이 많이 바뀌어서 볼 때 재미있었다면 그것만으로도 이미 훌륭하고 가치가 있다 여기게 되었습니다. 사실 나이가 들수록 재미의 기준이 까다롭게 변하는 것 같기도 하고요. 여기서 까다롭다라는 건 심미안이 생겨 보다 높은 경지를 요구하게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자라면서 뒤틀린 나무처럼 그저 쓸데없이 주관적인 기준만 늘어났다는 말이라 나이를 먹는다는 게 슬프기도 합니다. 현명하기 위해 시간을 썼어야 했는데 이놈의 시간이라는 게 가만히만 있어도 슁슁 가버리니까 참 곤란하네요.


  작가 ‘이마무라 마사히로’의 소설 ‘시인장의 살인’도 읽을 때는 재미있지만 돌이켜 생각하니 뭔가 이상한 소설입니다. 허나 이 작품으로 수상한 내역을 살펴보면 어, 내가 잘못 생각했나? 라는 기분이 들 정도로 화려하지요. 추리소설 신인상으로는 최고의 권위를 갖춘 아유카와 데쓰야 상과 본격 미스터리 대상을 수상했고 2018 이 미스터리가 대단해 1위, 2018 본격 미스터리 베스트 10 1위, 2017 주간 문춘 미스터리 베스트 10 1위, 제 15회 서점대상 3위 등에 랭크되어 추리소설 작가로서 더 할 나위가 없는 데뷔를 했습니다. 아유카와 데쓰야 상의 심사위원이었던 키타무라 카오루는 “기발한 발상(奇想)과 본격 미스터리의 조화가 대단히 훌륭하다”라고 평가했다는군요. 작가는 85년생으로 방사선 기사였지만 글쓰기에 집중하기 위해 29세가 되던 해에 일을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작가의 길에 들어섰다고 합니다. 결단력이 대단하네요. 생업을 그만두고 몇 년간 집필한 결과물이 좋은 성과를 거두어 다행이고 얼른 다음 작품도 읽어보고 싶네요.


  신코대학 신입생 ‘하무라 유즈루’는 미스터리 소설을 좋아하지만 라이트노벨만 읽는 미스터리 연구회에 실망하여 제대로 된 동아리 활동을 하지 못합니다. 그러던 와중 사건을 찾아 헤매는 한 마리 하이에나, 아니 신코의 홈스 ‘아케치 교스케’의 눈에 들어 둘이서 같이 미스터리 애호회 활동을 하게 되지요. 활동이라 함은 아케치가 사건을 찾아 아무 곳에나 고개를 들이밀면 하무라가 가서 대신 사과를 하는 행위를 뜻합니다. 아케치가 이번에 눈독을 들인 곳은 영화 연구부의 합숙. 영화 연구부에 협박장이 날아와 취소 직전까지 갔지만 결국 합숙을 할 거라는 말에 홀린 아케치는 합숙에 따라가고 싶다고 계속 요구했지만 이 합숙이란 게 별장을 가진 졸업생 선배와 영화 연구부의 여학생들 간의 미팅 성격이 있는 요망한 행사라 쉽게 참가할 수가 없습니다. 그때 아케치와 하무라 앞에 수수께끼의 미녀 ‘겐자키 하루코’가 나타나 어차피 미팅이니까 여자가 함께라면 합숙에 갈 수 있을 것이니 자기까지 셋이서 따라가자고 권합니다. 졸업생과 재학생 간에 미팅을 시켜주기 위한 합숙이라니 저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말도 안 되는 설정의 합숙이 이뤄지는 동안 별장의 근처에선 수천 명이 모인 커다란 규모의 락 페스티벌이 열리고 있었습니다. 허나 락 페스티벌에 참가한 인물들 중에는 음악에 몸을 맡기는 대신 사악한 음모에 몸을 던지는 이들이 있었으니…


  시인장의 살인은 아주 클래식한 클로즈드 서클 미스터리입니다만 서클을 클로즈하는 방식이 화끈합니다. 작가 아리스가와 아리스는 데뷔작에서 화산을 터뜨려 서클을 닫았는데 이마무라 마사히로는 좀비 떼로 서클을 닫았지요. 좀비? 그렇습니다. 이 소설에서는 좀비가 등장합니다. 좀비가 떼를 지어 별장을 습격하고 남은 사람들이 좀비를 막기 위해 급조한 바리케이드로 입구를 막지만 이 때문에 자신들이 별장에 갇히고 말지요. 이런 급박한 상황에서 누군가 살의에 눈을 떠 별장 안의 사람들을 도륙하고 다닌다는 게 소설의 내용입니다. 좀비로 서클을 닫다니, 문란한 열정이 넘치는 별장에 등장하는 건 기껏해야 제이슨 정도라고 생각했는데 거참 화끈하네요.


  시인장의 살인이 가진 가장 큰 장점은 속도감입니다. 추리소설은 기본적으로 턴 게임이라 범인이 한 수를 두면 탐정이 따라서 한 수를 두거나 범인이 미리 10수를 두면 탐정이 뒤이어 10수를 두는 식이라 긴장감은 끌어올릴 수 있어도 속도감을 갖추기는 힘든데 이 소설에서는 등장인물들을 먹고 싶어 안달이 난 좀비 떼가 무대 밖에 대기하고 있다가 틈만 나면 습격하기 때문에 전개가 상당히 역동적이고 빠릅니다. 1층, 2층, 3층까지 차례로 점령당하며 급하게 달아나는 장면이 연속되어 독자들에게 지루할 틈을 주지 않아요. 두 번째로 근사한 점은 좀비라는 소재를 트릭에 적극적으로 녹였다는 사실입니다. 살인마다 좀비의 소행으로 보이는 단서가 놓여 좀비를 단순히 배경이나 도구 정도가 아닌 수준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좀비를 단지 장르적 크로스오버가 아니라 트릭의 중요한 요소로 썼다는 점에서 작가의 실력과 숙고가 엿보이지요. 자, 장점은 여기까지 하고…


  단점을 더 길게 쓰는 건 싫은데… 재미있게 읽어놓고는 단점만 늘어놓는 건 염치없다고 생각하기도 하고요. 하지만 시인장의 살인은 장점이 명백한 만큼 단점도 큽니다. 우선 가장 크게 다가오는 단점은 등장인물들이 하나같이 너무 얄팍하다는 점입니다. 매력적인 캐릭터가 영 없네요. 화자 하무라 유즈루가 깔아놓는 애매한 복선은 설득력이 부족하고 탐정 겐자키 하루코도 참신함이 느껴지지 않네요. 졸업생과 재학생이 합숙을 가장한 미팅을 한다는 설정 자체는 어떻게든 이해할 수 있을 법 하지만 그 대상인 졸업생이 매년 갱신되지 않는다? 졸업생은 매년 고정되어 있는데 여학생만 새로운 사람으로 데려간다? 게다가 그게 가능한 이유라는 게 별장을 가진 졸업생의 아버지가 사장이라 영화 연구부 부장이 취직을 할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사장인 애는 그렇다고 쳐도 다른 졸업생들은 걔 친구라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없는데? 아무리 작중 여학생들이 합숙에 참가하지 않으려 했다고 해도 너무 무리인 설정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무리수 넘치는 설정에 올라타고 있으니 등장인물들이 얄팍하게 보일 법도 하지요. 설정의 한계를 넘는 매력이나 재치를 지닌 등장인물은 없고 다들 어디서 본 듯 전형적이라는 점은 무척 아쉽습니다. 두 번째 단점은 사실 두 번째 장점과 맞닿아 있습니다. 트릭에 좀비가 중요한 요소라는 점이지요. 복잡한 듯 보이는 트릭이 이어집니다만 좀비라는 토대로 쌓아올린 트릭이라 좀비에만 주목하면 어렵지 않게 문제가 풀립니다. 트릭에 대해 고민하면서 좀비를 꽤 제 편의적으로 움직여가며 해답을 만들었는데 정답에 너무 가까워서 좀 당황스러웠습니다. 그 외에도 단서를 뿌리는 타이밍이 좀 애매하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만 신인 작가에게 이런 걸 불평하는 제가 속이 좁은 인간인 거고…


  단점을 더 길게 쓰긴 했지만 시인장의 살인은 재미있는 작품입니다. 전통적인 트릭 미스터리의 구색을 잘 갖추면서도 좀비라는 매력적인 소재를 적절하게 녹여냈습니다. 권위있는 단체들이 괜히 신인상을 주지 못해 안달이 난 게 아니었음을 읽는 동안 느낄 수 있었습니다. 허나 캐릭터의 조형이 전체적으로 허술하다는 점은 마음에 걸리네요. 이게 시간이 지나고 경력이 쌓인다고 쉽게 고쳐지는 문제가 아니다보니… 다음 혹은 다다음 작품까지는 읽어보고 싶습니다.




덧글

  • 싱가폴 찰리 2018/12/11 10:04 # 답글

    저도 이 책을 읽었는데 장점과 단점 모두 제 느낌과 같군요 ㅎㅎㅎ
    저도 적어도 이 작가의 다음작품까지는 무조건 읽어볼 계획입니다
  • 정윤성 2018/12/11 18:53 #

    다음 작품에서는 더 나아진 모습을 보여주면 좋겠습니다.
    장점이 아주 뚜렷하니까 부디 장점은 살리고 단점은 극복했으면 좋겠네요. 뭐, 말처럼 쉬운 게 아니겠지만요...
  • watermoon 2018/12/11 13:31 # 답글

    요즘 일본 추리소설보면 트릭에만 신경쓰느라 캐릭터들이 너무 평면적이라 게임 설정집같은 느낌이 들어요 애니메이션이나 게임으로 가기 전 단계라는 느낌이 확 오더라구요. 저도 읽기는 재미있게 읽었는데 트릭만 기발할 뿐 인물들 하나하나가 너무 뻔했어요.
  • 정윤성 2018/12/11 18:58 #

    네, 특히 8,90년생 젊은 작가들이 그런 경향을 많이 보이는 것 같습니다. 기저에 깔인 오타쿠 문화의 영향이나 본인의 취향 그리고 원 소스 멀티 유즈를 노리는 작가 및 편집자의 상업적 욕망 등에서 이유를 찾을 수도 있겠지만 역시 독자들이 그런 걸 원하는 시대가 된 게 가장 큰 원인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허나 그저 시대의 영향이라 부르기에는 아쉬움이 크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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