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열쇠의 계절 -일본


 작년, 아니 재작년 작가 요네자와 호노부에 대해 이야기하며 국내에 번역되지 않은 신간이 하나 나왔는데 기존 시리즈의 신작이 아니라고 했던 그 책 ‘책과 열쇠의 계절’이 일본 출간 약 1년 만에 국내에 번역되었습니다. 빠르다!

 책과 열쇠의 계절에 대한 감상에 앞서 우선 이번에도 재작년과 비슷한 말씀을 드려야 할 것 같네요. 2020년 현재를 기준으로 국내에 번역되지 않은 작가의 작품은 딱 하나 뿐이며 이는 기존 시리즈의 신작이 아닙니다. I의 비극(Iの悲劇)이라는 제목의 소설이며 아마존에 적힌 설명에 따르면 한번 죽었던 마을에 사람들을 되돌려 보내는 공무원 부서, 이른바 소생과(甦り課)의 세 공무원들이 성깔있는 이민자들 사이에서 겪는 미스터리 희비극이라고 하네요. 흠, 재미있겠다. 아무튼 고전부 등의 기존 시리즈 완결이 아직 한참 멀었다는 점은 올해도 변함이 없을 듯 합니다. 한 가지 다행스러운 사실은 그간 소시민 시리즈의 단편 하나가 잡지에 연재되었다는 것입니다. 소시민 시리즈 단편이 이제 네 개가 쌓였고 여섯 개 정도면 대개 단행본으로 출간이 된다는 사실을 고려해볼 때 소시민 시리즈가 대망의 완결을 맞이할 날이 2년에서 3년 정도 남았다는 추측을 할 수 있다는 이야기지요! 어디까지나 불확실하고 낙천적인 예상일 뿐입니다만. 고전부는… 내가 죽기 전에는 완결이 나겠지…


 책과 열쇠의 계절은 여섯 개의 연작 단편으로 이루어진 소설집입니다. 고교 2학년 도서위원 호리카와 지로와 마쓰쿠라 시몬이 주인공이며 두 사람이 겪는 일상 속 미스터리를 (책 소개에 따르자면)상쾌하면서도 살짝 씁쓸하게 담아낸다고 하는데… 살짝?

  913 - 모리스 르블랑의 813을 패러디한 것으로 보이는 제목입니다. 내용도 금고를 따는 것이라 더욱 확신이 드네요. 호리카와가 은근히 마음에 두고 있던 3학년 선배가 암호해독을 요청합니다. 할아버지의 유품이 금고에 있는데 서재에 단서가 있는 게 분명하다면서요. 진짜로 금고를 딸 자신은 없지만 그냥 가서 보기만 하는 정도라면 뭐… 하며 선배를 따라가려는 호리카와를 보며 마쓰쿠라는 자신도 따라가겠다고 합니다.

  록 온 로커 - 할인쿠폰을 쓰기 위해 미용실로 향하는 두 사람. 두 사람은 각각 친가와 외가에 탈모 유전자가 발현한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를 하며 미용실에 들어서는데 어째 분위기가 묘합니다.

  금요일에 그는 무엇을 했나? - 도서위원 후배의 형이 쓴 누명을 벗겨주려는 이야기입니다. 형은 알리바이가 있으니 괜찮다지만 동생은 믿지 못하는데… 그냥 형한테 전화해서 알리바이가 뭐냐고 물으면 안 되나? 그 대신 학교 선배 둘에게 알리바이를 추리 해달라는 건 내가 봐도 좀…

  없는 책 - 일개 학교 도서위원이라고 해도 개인정보는 철저히 지킨다는 사명감 넘치는 이야기, 는 아니고 죽은 친구가 도서실에서 빌렸던 책이 뭐였는지 물어보러 온 선배가 수상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옛날이야기를 해줘 - 이제는 꽤 친해져서 서로 속마음을 터놓기 시작하는 호리카와와 마쓰쿠라. 옛날이야기라는 식으로 자신들의 과거를 털어놓는데… 고등학생이라도 심각한 과거를 가질 수 있는 거지요.

  친구여, 알려하지 마오 - 옛날이야기를 해줘, 에서 이어지는 이야기. 그것 참, 친구라는 게 뭐고 돈이라는 건 또 뭔지.


 요네자와 호노부답게 그냥 청춘 미스터리가 아니었습니다. 마음 편히 읽게 놔두지 않을 거라는 작가의 의지가 입안 가득한 쓴맛으로 다가오는 소설이네요. 파슬리 콜라 운운할 때부터 알아차렸어야 했는데. 첫 에피소드부터 독자의 뒤통수를 후려갈기고 시작하는데 거참… 좋아할 수밖에 없는 작가입니다.

  913은 이 소설에서 달달한 첫사랑 따위를 기대하지 못하도록 확실하게 포문을 엽니다. 또한 주인공들을 도서위원으로 설정한 이유도 선명하게 드러내지요. 문장 구석구석에서 작가가 정말 쓰고 싶어서 썼다는 인상이 물씬 풍기는데 그래서 더욱 맞다, 이 작가 성격이 나빴지,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록 온 로커는 완성도 면에서는 애매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913에 비하면 너무 소품 같은 이야기라는 인상을 받았지요. 허나 배경이 미용실이라는 점은 좋았어요. 여성분들께선 아시려나 모르겠지만 남자, 특히 사춘기 남자에게 미용실은 허들이 높습니다. 들어가는 것도 부담이지만 헤어 디자이너 분과 말을 해야 하는 게 엄청난 스트레스지요. 이 나이를 먹은 저도 “짧고 단정하게 깎아주세요”라는 말에 “어떤 식으로 짧게 해드릴까요?”라는 대답이 돌아오면 그때부터 동공에선 지진이 나고 머리에선 패닉이 노래 부릅니다. 물론 대부분의 미용사 분들은 저를 딱 보기만 해도 견적이 나오는지 아무 것도 묻지 않고 알아서 잘 잘라주지만요. 역시 프로는 달라. 쿠폰이 있으니 미용실을 가는 게 맞는데 들어가기 힘든 외관에 멈칫하고 다양한 서비스에 당황하며 적극적으로 말을 거는 미용사를 부담스러워하는 고교생들의 모습을 읽는 건 즐거웠습니다.

금요일에 그는 무엇을 했나? 는 마쓰쿠라의 성격을 드러내는 용도로 이야기를 소모한 게 아닌가 싶어서 역시나 좀 애매했습니다. 불량아인 형이 시험문제를 훔치려했다는 누명을 쓰지만 형 본인은 알리바이가 있다고 자신하더라, 그러니까 선배들이 그 알리바이가 뭔지 알아내달라… 라는 이야기는 설득력이 부족하지요. 물론 나중에 이유가 될 법한 사정이 밝혀지지만 그것도 좀 부족한 감이 있어요. 나이를 먹어서 제가 깐깐해진 건가 싶은 마음도 있습니다만. 하하하. 하하. 하…

 없는 책에서는 호리카와와 마쓰쿠라의 차이가 드러납니다. 두 주인공의 다른 성격은 이후 옛날이야기를 해줘와 친구여, 알려하지 마오에서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동력이 되지요. 내용 자체는 평범해서 이어지는 이야기를 위한 발판 정도의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옛날이야기를 해줘에서는 마쓰쿠라의 과거가 본인의 입을 통해 그려집니다. 또한 앞서 대등한 수준의 추리력을 펼친 두 사람입니다만 호리카와는 선천적인 재능으로, 마쓰쿠라는 후천적인 노력으로 이루어낸 능력임이 밝혀지지요. 왜 고교생밖에 안 된 아이가 주위를 꼼꼼히 관찰하고 파악하여 적확한 결론에 도달하려는 노력을 하는 지에 대해 공감 가는 사연이 나온 뒤 두 사람이 서로 힘을 합하는 모습이 무척 청춘드라마스럽지요. 나름대로 해피엔딩에 도달하는 것 같던 이야기는 허나 호리카와는 물론 눈치 빠른 독자라면 금세 눈치 챌 법한 트릭을 품고 있습니다.

 친구여, 알려하지 마오는 옛날이야기를 해줘에서 바로 이어집니다. 순조롭고 아름답게 끝나야 할 이야기 속에 숨은 모순의 이질감을 떨치지 못한 호리카와는 곧장 진실을 향해 나아갑니다. 친구가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지요. 왜 했는지도 짐작이 갑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 할까요? 뛰어난 추리력 때문에 생긴 우정이 추리력 때문에 위태롭게 흔들립니다. 진실을 찾는 것은 쉽지만 친구라는 관계의 애매함은 어렵습니다. 그냥 제목처럼 알려하지 마는 게 정답일까요?

 고등학생 주인공들이 나오지만 작가의 전작들과 궤가 다릅니다. 주로 다루었던 주제인 탐정인 주인공이 가진 스스로에 대한 믿음과 그 믿음의 위험함 대신 탐정이기에 생기는 타인과의 관계, 특히 우정에 대해 주목하고 있지요. 이는 굳이 추리에 국한되기보다 어딘가 빼어난 구석이 있는 청소년 모두로 대상을 확장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간의 작품들보다 좀 더 보편적인 인간상을 보여줍니다. 뭐, 전 어느 한 구석도 빼어났던 적이 없어서 대충 짐작만 할 뿐이지만요. 하하하. 하하. 하… 보편성을 추구하긴 했어도 청춘이라는 장르를 밟아버리겠다는 기상만큼은 여전해서 동급생, 선배, 후배에 친구까지 다양하게 섞어가며 꿈과 희망을 잘근잘근 밟아댑니다. 913은 진짜 곱씹을수록 쓴맛이 강하네요. 이래야 요네자와 호노부지! 싶은 기분도 들지만요.

 전체적으로는 요네자와 호노부라는 중견 작가의 발전과 변화 과정이 드러나는 작품이라는 점에서 만족스럽습니다만 절반 가까운 단편들이 등장인물, 혹은 다음 단편을 위해 소모적으로 쓰이고 말았다는 느낌이 들어서 아쉽습니다. 약간 추리를 잘하는 정도인 주인공을 내세웠다는 점에서 이해가 가는 부분도 있지만 이야기 속 트릭의 완성도가 부족하다는 감을 지우기 힘드네요.


 책과 열쇠의 계절을 뛰어난 추리소설이라고 부르긴 힘들지만 매력적인 주인공들이 나오는 청춘소설이라 하기에는 주저함이 없습니다. 어쩐지 아련함마저 느껴지는 마무리도 참 좋았어요. 고교생 탐정의 이야기임에도 고전부나 소시민, 그 외의 작가가 쓴 다른 이야기들과도 비슷하게 느껴지지 않았다는 점에도 감탄했습니다. 재미있게 잘 읽었으니까 이제 고전부도 좀 써줬으면… I의 비극은 또 뭐니 대체… 지금은 이렇게 말하지만 내년 즈음엔 I의 비극을 읽으며 헤헤, 재밌당… 이러겠지. 미래가 보인다.


 여담입니다만 번역 자체는 전반적으로 훌륭했는데 ‘칙찬’이나 ‘중인방’ 같은 단어를 그냥 사용한 점은 좀 의아하더군요. 주석에 달린 칙찬 와카슈라는 설명을 보고 처음에는 뭐지? 와카집의 이름을 한자로 그냥 쓴 건가? 아닌 것 같은데? 했다가 사전을 보니 왕이 몸소 시나 글을 지음, 이라는 뜻을 보곤 이걸 왜 그냥 썼는지 의문이 절로 들었어요. 왕이 직접 쓴 와카집이라고 하면 안 되나? 왕 부분을 천황으로 쓸지 일왕으로 쓸지 고민하다가 그냥 칙찬으로 밀었나? 그런 거면 약간 이해가 가는 부분도 있지만… 흠.




덧글

  • 방울토마토 2020/01/15 22:55 # 답글

    호노부의 책을 다 읽어서 그런지 어느정도 줄거리가 예상도 되더군요.. 소시민 시리즈는 겨울편이 아니라 단편집이 나온다는 얘기가 있던데요?
  • 정윤성 2020/01/16 18:10 #

    단편집이라니... 아... 안 돼... 그렇다면 가을편처럼 겨울편도 장편으로 나올 가능성이 있겠군요. 이것도 죽기 전까지 나오기만 기다려야 하나ㅜㅜ
  • watermoon 2020/01/16 19:32 # 답글

    이 작가 어쩐지 성격 진짜 나쁠것 같아요 어쩐지 맘에 드는 후배 엄청나게 괴롭히고 혼자 좋아하는 선배같은 느낌이라니까요
  • 정윤성 2020/01/16 20:53 #

    말씀대로 마음에 '드는' 사람만 괴롭힐 거 같지요. 그런 사람들이 꼭 하나씩은 있다니까요.
  • 에바투나 2020/02/26 01:27 # 삭제 답글

    이 책 검색해보다가 들어왔는데 쓰셨던 글들이 굉장히 도움이 됩니다! 추천하신 일곱번 죽은 남자도 재밌게 봤습니당
  • 정윤성 2020/02/26 23:57 #

    기분 좋은 덧글 감사합니다! 도움이 되었다니 굉장히 뿌듯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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