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홍빛 하늘 아래 -미국


 ‘진홍빛 하늘 아래’는 2차 세계대전 당시 큰 활약을 했던 이탈리아 소년 ‘피노 렐라’의 실화를 소설로 엮은 이야기입니다. 작가는 내용의 90퍼센트 이상이 사실이지만 당시의 상황을 증명할 인물들 대부분이 사망했고 증거 또한 소실되었기에 어느 정도의 허구를 불가피하게 포함하여 논픽션에 가까운 픽션으로 창조했다고 말합니다. 이 소설을 쓴 ‘마크 설리번’은 18권을 소설을 발표한 베스트셀러 작가로 데뷔작부터 이름을 알렸다고 하네요. 국내에는 딱히 소개된 작품이 없습니다만… 성공적인 데뷔 이후 한창 잘 나가던 작가는 여러 사건들을 겪으며 어느덧 슬럼프에 빠지게 되고 마흔일곱 살에 개인 파산을 앞두고 자살까지 생각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남은 가족들을 떠올리며 간신히 마음을 추스른 작가는 신께 이야깃거리를 달라고, 내 그릇보다 큰 뭔가를 달라고 간절히 기도를 하다가 그날 저녁 피노 렐라에 대한 이야기를 듣습니다. 곧장 피노를 찾아간 작가는 그가 겪은 놀라운 이야기에 매료되지요. 이후 10년간 자료를 조사하고 관계자들을 인터뷰하며 피노의 삶을 세상에 공개할 준비를 한 작가는 진홍빛 하늘 아래라는 소설을 출간하며 큰 성공을 거둡니다. ‘톰 홀랜드’를 주연으로 영화도 제작한다고 하네요. 와! 톰 홀랜드! 스파이더맨! 하며 검색을 해봤는데 17년에 제작 발표 이후 딱히 이렇다 할 뉴스가 없네요. 엎어졌나? 톰 홀랜드의 스케쥴을 생각하면 질질 밀리다가 엎어져도 사실 이상할 건 없어요. 스파이더맨에 언챠티드에 다시 스파이더맨에…


 서문에서 작가가 파산을 앞두고 자살을 생각했다는 이야기를 읽고 마음이 찡했어요.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었는데 돈을 다 어디 썼냐는 생각도 잠깐 들었지만 돈이라는 게 낭비를 안 해도 사라지는 경우가 워낙 많으니… 자살을 포기한 뒤 이야깃거리를 달라는 기도를 했다는 말에도 마음이 찡했지요. 독자들이 내 책을 외면했다, 내 능력보다 큰 뭔가를 달라는 기도가 참 안타까웠습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책을 읽었는데 이런 감상을 쓰는 건 마음이 아프지만 결론부터 적자면 신은 작가의 기도를 너무 잘 들어주셨어요. 피노 렐라의 이야기는 정말로 작가의 능력보다 훨씬, 훨씬 더 컸습니다…


 2차 대전 말기, 밀라노에 사는 17살 피노는 낙천적이고 정의로운 소년입니다. 나치의 손에서 도망치려는 유대인들을 도와 알프스를 넘어 스위스까지 인도하는 역할을 수행하지요. 그러던 와중 18살이 된 피노는 곧 강제로 입대하게 될 처지에 놓입니다. 피노의 아버지와 외삼촌은 강제 입대 이후 최전방으로 보내지느니 차라리 독일군에 자진 입대하여 목숨을 보전하는 쪽이 나을 거라는 생각을 하고 피노를 억지로 독일군에 집어넣지요. 어제까지 유대인들의 목숨을 구하다가 뜬금없이 독일 군복을 입고 하일 히틀러를 하게 된 피노. 심지어 어쩌다보니 히틀러의 최측근인 ‘한스 레이어스’ 장군의 운전병이 됩니다. 외삼촌은 차라리 이 상황을 이용하자며 레이어스 장군의 옆에 있으며 정보를 빼내라고 하지요. 피노는 스파이가 되어 독일군과 파시스트들의 정보를 수집하며 점점 위험한 수렁 속으로 발을 디디는데…


 놀라운 실화입니다. 어린 소년에 불과했던 피노 렐라가 겪은 모든 사건들과 이뤄낸 모든 성과들은 아주 대단해서 허구였다면 오히려 과하다고 여길 정도입니다. 열일곱 살밖에 안 되는 아이가 등산 초보자들을 데리고 험준한 알프스를 넘나드는 일을 1년 가까이 한 것만으로도 대단한데 그 다음에는 독일군 스파이 역할까지 했으니 믿기 어려운 것은 무리도 아니지요. 이 소설을 읽은 뒤 감상문을 적기 위해 조금 찾아본 바에 의하면 비단 피노 렐라 뿐 아니라 당시의 이탈리아에는 위대한 인물들이 아주 많다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추축국 중 하나임에도 「이탈리아계 유대인의 약 80%가 이탈리아 파르티잔의 도움을 받아 생존했다」는 기사가 있을 정도로 나치에 열심히 저항했다고 하네요. 물론 한쪽에서는 파시스트들이 전쟁과 파괴를 일삼고 있긴 했지만요. 최근 ‘메들린 올브라이트’가 쓴 저서 ‘파시즘’을 읽었는데 예상대로 파시즘은 참 허접한 개념이구나, 싶었지요. 이 정도로 허접해야 대중을 매료시킬 수 있다는 점이 아이러니합니다. 일단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하기로 하고… 아무튼 진홍빛 하늘 아래는 매력적인 소년 영웅이 등장하는 역사소설입니다. 실화를 기반으로 했다는 점이 더욱 놀랍지요. 이것으로 끝났다면 더할 나위가 없었겠지만 앞서 말씀드렸던 것처럼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작가의 실력입니다.

  작가는 이야기를 위해 조사를 철저히 했지만 소실된 자료가 너무 많았고 이탈리아 내에서도 굳이 전쟁의 기억을 상기하고 간직하려 하지 않았기에 쉽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러니저러니해도 이탈리아는 전쟁을 일으킨 나라 중 하나였기에 유대인들을 구출하기 위해 결성되었던 가톨릭 비밀단체나 나치와 맞섰던 파르티잔들에 이탈리아 측도, 연합군 측도 이후 거의 관심을 주지 않았다고 하네요. 사학자들은 이를 '잊힌 전선(Forgotten Front)'이라 부른다 합니다. 심지어 작가와 인터뷰한 게릴라 전사 출신 노인마저 「그 시기를 과거의 일로 돌리고 싶었다, 이탈리아에서는 아무도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해 말하지 않기에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P.14)라고 말했답니다. 때문에 작가는 피노 렐라의 이야기 속 부족한 부분을 채우기 위해 자신의 상상력에 의존하여 어떤 경우에는 사건과 등장인물들을 섞거나 압축했고 상황들을 각색하기도 했다, 고 밝히며 그래서 이 이야기는 논픽션이 아니라 전기적 역사소설이라 말합니다.


 이 소설은 크게 두 가지 부분으로 나뉩니다. 밀라노를 떠난 피노 렐라가 유대인들을 도와 알프스를 넘는 길잡이 역할을 하는 전반부와 독일군에 입대하여 스파이 역할을 하는 후반부로 나눌 수 있지요. 전반부의 전개는 대단히 깔끔합니다. 당시의 상황, 주위의 판단, 피노 렐라의 의지 등이 어우러져 험난한 알프스를 훌쩍훌쩍 넘나들며 유대인들을 나치의 손아귀에서 구해내는 장면이 근사한 영웅담으로 완성되지요. 사실 이 부분에서는 갈등이라 부를 구간이 없어서 무난하게 흘러갑니다. 문제는 갈등이 마구 터지는 후반부입니다. 어제까지는 유대인들을 구하고 뿌듯해하던 피노 렐라가 독일군 완장을 차고 유대인과 이탈리아인들이 노예처럼 강제노동을 하는 장면을 목격하며 느끼는 고뇌, 그럼에도 스파이 노릇을 제대로 하기 위해 눈앞에서 벌어지는 모든 악행을 똑바로 바라보고 기억해야 하는 고통, 독일 놈이 된 피노를 경멸하는 친구들에게 사실을 이야기하지 못하는 슬픔, 그 와중에 레이어스 장군의 정부의 하녀와 사랑에 빠져서 행복하기도 한 복잡한 감정들을 모두 끌어안은 피노 렐라의 이야기만으로도 작가 입장에서는 선이 복잡하게 얽힌 시한폭탄을 다루는 난이도가 되는데 작가는 여기에 하나의 축을 더합니다. 바로 한스 레이어스 장군이지요. 만나는 모든 이에게 인연이라는 이름으로 빚을 지우는 남자, 더없이 냉정하지만 사람을 아낄 줄 아는 남자, 사람을 죽이는 것도 도움을 주는 것도 서슴치 않는 남자. 히틀러의 최측근이자 나치의 정점이면서도 밀라노의 파괴와 무의미한 학살을 막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한스 레이어스의 양면적인 모습은 꽤나 매력적이어서 피노와 한스 둘을 축으로 삼아 이야기를 풍부하게 만들 수도 있었을 겁니다. 문제는 작가가 이를 균형적으로 다룰 실력이 부족했다는 점이지요.


 전반부에서 능동적이던 피노 렐라는 후반부에 스파이가 되며 한스 레이어스 옆에 자리잡은 관찰자가 됩니다. 주인공에서 화자의 위치로 옮겨간 셈인데 이 전환이 자연스럽지 않습니다. 작가는 피노 렐라가 여전히 활약하길 원해서 세세한 스파이 활동을 모두 담아내는 동시에 안나와의 로맨스도 부각하려고 합니다. 세세한 스파이 활동을 하려면 한스 레이어스를 세세하게 관찰해야 하니 레이어스의 비중도 쭉쭉 올라갑니다. 결과적으로 피노는 한스의 꽁무니를 쫓아다니며 앵무새처럼 어제는 한스가 뭘 했다, 오늘은 뭘 했다, 라는 이야기를 하며 그 과정에서 나는 화가 났다, 나는 슬펐다, 라는 감상을 덧붙이는 구경꾼이 됩니다. 또한 그게 끝나면 안나에게 달려가 알콩달콩 사랑을 나누지요. 이 과정에서 한스의 비중을 더 늘리기 위해 한스의 행적에 양면성을 부여하여 한스가 나쁜 놈인 건 확실한데 마냥 나쁜 짓만 하는 건 아닌데다 사람이 마냥 나쁘지도 않아서 나는 고민이 된다, 같은 부연설명이 덕지덕지 달라붙습니다. 이러한 판단이 18세 소년의 시선이라는 필터를 온전하게 거쳐서 유치하지만 솔직하게 서술이 되냐면 그렇지 않고 작가의 의도가 꽤 선명하게 드러나는 편이라 더욱 애매합니다. 전반부의 깔끔하고 속도감 있는 전개는 후반부에 들어 복잡하고 다층적인 진행과 다수의 인물들이 얽히는 촘촘한 감정선으로 이어져야 하는데 상대적으로 지저분하고 밍기적대는 수준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피노, 한스, 안나의 이야기가 서로 시너지를 내야하는데 피노는 한스가 움직여야 자신도 이야기할 게 생기고 안나는 피노와 만나야 이야기할 게 생겨 한스가 피노를 예속하고 피노가 안나를 예속하는 결과만 생겨납니다. 작가가 이를 제어하지 못하기에 이야기는 점점 어딘가에서 읽었던 장면들과 충분히 예측가능한 감정들로 채워지고 이는 실화가 가진 현실성을 포기하는 단계로 나아갑니다. 이야기는 더 이상 현실이 연주하는 우연과 의지의 음악이 아니라 작가의 손이 보이는 피아노 줄에 매여 뻔하다는 감상의 골로 향하지요. 작가는 90퍼센트 이상이 실화라고 말했고 저도 그 말을 믿습니다. 허나 남은 10퍼센트가 마크 설리번의 보이는 손이 되어 이야기를 제어했고 결과는…


 진홍빛 하늘 아래는 피노 렐라라는 영웅을 세상에 드러냈다는 점만으로도 충분히 가치있는 소설입니다. 허나 소설로서의 가치가 충분하냐면 그건 아닙니다. 완성도가 높다고 할 수 없으며 작가의 욕심이 앞섰고 실력은 부족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훌륭한 소재를 생각하면 안타깝지만 추천할 법한 소설은 아닙니다.




덧글

  • . 2020/03/04 20:39 # 삭제 답글

    정말로 '내 능력보다 큰 뭔가'였던 거군요;;
  • 정윤성 2020/03/05 16:59 #

    능력을 키워달라고 기도를 했으면 어땠을까 싶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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