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옷을 입은 소녀 -미국


 ‘푸른 옷을 입은 소녀’는 작가 ‘데릭 B. 밀러’의 두 번째 장편 소설입니다. 작가는 20여 년간 국제 분쟁 업무에 종사한 전문가이며 UN 주재 한국 상임 공관에서 일을 한 경력도 있다고 하네요. 국제 분쟁 관련 전문가라고 하면 미드에서 자주 본 이미지가 있지요. 터번을 두르고 수염이 덥수룩한 중년 미남이 화상 전화 화면으로만 등장해서 여기는 당신들의 상식이 통하는 곳이 아니오! 하고 소리 지를 것 같은 이미지가 있는데 위키에 있는 밀러 씨의 사진을 보니 눈이 아주 느끼하게 생긴 미남이었습니다. 이미지에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얼굴이더군요. 13년에 ‘Norwegian by Night’으로 데뷔한 작가는 존 크리시 대거 상 등을 수상하며 성공적인 발걸음을 내딛습니다. 16년에 출간된 두 번째 소설인 푸른 옷을 입은 소녀는 중동원조회의에서 선정하는 도서 상을 받았고 18년에는 세 번째 소설 ‘American by Day’를 발표했습니다. 첫 소설 제목이 밤의 노르웨이인이고 세 번째 소설의 제목은 낮의 미국인이라니 재미있네요. 여담이지만 국내에 출간된 푸른 옷의 소녀 표지 날개에 적힌 저자의 약력에는 세 번째 소설 제목을 아메리칸이 아니라 아메리카로 적어놨는데 오타입니다.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의 오탈자네요.


 91년 이라크의 줄루 검문소에서 한가로이 감시를 하고 있던 이병 ‘알우드 홉스’는 저 멀리서 다가오는 누군가를 발견합니다. 타임지의 기자 ‘토머스 벤턴’이었지요. 사막의 폭풍 작전과 이후 벌어진 지상전도 끝나고 정치적 협의만 남은 상태에서 마냥 시간을 때우던 알우드는 인근 마을인 사마와로 가서 이라크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겠다는 벤턴을 그냥 보내줍니다. 벤턴은 사담 후세인의 행보나 이라크의 미래 등에 대해 이라크 국민에게 직접 묻기 위해 마을로 향하지만 정작 벤턴을 본 사마와의 주민들은 그에게 같은 걸 묻습니다. 미국은 사담에게 무엇을 할 것이며 이라크는 또 어찌할 것인지. 그들은 사담 때문에 이란과 싸웠고 쿠웨이트와도 싸웠고 미국과도 싸웠으니 사담을 없애야 하는 것 아니냐고 묻지만 영국 기자인 벤턴이 알 리가 없었지요. 그 시각 알우드는 상관 모건 중위의 발표를 듣고 있습니다. 모건은 미국은 이라크 내에서 벌어지는 내전에 관여할 뜻이 없다고 부하들에게 말하지요. 딕 체니가 말하길 지금 반란군을 도와주면 나중에 저들이 우릴 원망하기 때문에 지금 죽게 놔두면 장기적으로는 저들과 더 나은 관계를 맺을 수 있다, 라고 설명합니다. 부하들은 돕지도 않을 거면 왜 왔냐, 돕든가 꺼지든가 둘 중 하나를 하자고 말하지만 군대답게 부하들의 의견 따윈 아무리 상식적이어도 중요하지 않지요. 그때 북쪽의 이라크 지상군을 피해 난민들이 검문소로 몰려옵니다. 알우드는 벤턴을 구하기 위해 급히 사마와로 향하지요. 벤턴 또한 밀려드는 군인들을 피해 달아나는 중입니다. 도주 경로에 있던 트럭으로 열심히 달리던 벤턴은 트럭 뒤에 숨은 녹색 드레스의 소녀를 발견하고 같이 달아나다 알우드와 만납니다. 셋은 열심히 달아나지만 휴전선 근처에서 꼼짝없이 붙잡히지요. 이라크 군인들의 대장인 대령은 소녀를 가리키며 자기 걸 가지고 있으니 내놓으라고 하지만 알우드는 이 아이가 자기 사촌이라며 감쌉니다. 모건 중위가 다가와 셋을 미군 기지 쪽으로 인도하는 찰나 대령은 소녀의 등을 쏴버립니다. 대령을 죽이려는 알우드와 말리는 벤턴. 그 이후로 22년이라는 시간이 지나고 어느 날 벤턴은 알우드의 전화를 받습니다. 알우드는 당장 인터넷으로 쿠르드 자치구, 녹색 드레스, 오늘이라고 검색하라며 전화를 끊고 검색 결과로 나온 동영상에서 벤턴은 22년 전 죽은 소녀가 시리아 난민들 사이에서 줄을 서 있는 모습을 봅니다. 20초 후 박격포가 떨어지며 동영상이 끝나고 다시 울린 전화기에선 당장 이라크로 오라는 알우드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저자 약력과 줄거리 요약을 쓰고 난 뒤 사흘 간 감상을 쓰다 지웠다 쓰다 지우길 반복했습니다.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쓰다보니 조잡해졌어요. 자신에게 한없이 너그러운 제 성향으로 판단해도 감상이 너무 조잡해서 도저히 이어 쓸 수가 없더군요. 22년이라는 시간을 단숨에 넘기는 작가의 화끈함이나 글로 서술하지 않은 그 시기를 능히 짐작케 하는 인물들의 묘사에 대한 감탄을 줄줄 써내려가다가 지웠지요. 난민 소녀가 눈앞에서 살해당하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던 주인공 알우드와 벤턴이 느꼈을 감정과 그 순간이 트라우마로 남아 22년 뒤 주인공들을 어떻게 뒤틀었는지 독자로 하여금 상상할 수 있게 만드는 담담한 묘사가 일품인데 이게 얼마나 대단한지 구구절절하게 이야기하고 싶어서 한 페이지, 두 페이지가 넘게 써대다가 결과물을 보니 흉하기 짝이 없어 지우고 또 지웠지요. 또한 소설의 형식을 제대로 갖추고 있으면서도 걸프 전쟁이 끝난 직후 이라크 내의 혼란이나 이어진 내전에 대해 정보를 제공하고 22년이 지난 뒤에도 마치 거울을 보는 것과 같이 비슷한 상황에 처한 이라크라는 나라와 역사에 대해 독자가 생각 이상으로 아무 것도 모른다는 점을 넌지시 깨닫게 하여 작금의 이슬람이나 테러 등에 관하여, 그리고 ISIL이라는 추악한 변종에 관하여 보다 복합적이고 넓은 관점을 지니도록 돕는 훌륭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지겹게 늘어놓는 것이 아니라 알우드와 벤턴이 푸른 옷을 입은 소녀를 구하러 가는 도중과 구하다가 잡혀서 포로가 된 상황 등에서 이어지는 대화 등으로 짧고 흥미롭게 엮어나간다는 점에서 작가가 이슬람 지역의 문제에 대해 얼마나 깊은 이해를 가지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다는 점이 놀랍습니다. 「사람들을 어떤 이유로든지 설득할 수 있어야 조종할 수도 있는 겁니다. 어떤 이맘(이슬람 종교 지도자)이 어느 날 갑자기 수니파들에게 뉴욕 양키스 팬들을 죽이라고 지시한다고 해 봅시다. 그럼 정말로 양키스 팬들을 죽이러 갈까요? 아니죠. 수니파 사람들은 그 주장에 설득될 이유가 없으니까요. 시아파를 죽이러 가자? 그건 말이 되죠. (중략) 마음이라는 게 정말 신기한 겁니다. 사람들의 마음은 절대 바뀌지 않아요.」(p.246)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 특히 저희처럼 이슬람과 거의 관련이 없는 작은 나라의 국민이라면 수니파와 시아파가 서로 싸운다는 정도는 알아도 왜 싸우는지, 어느 정도로 싸우는지에 대해서는 알기 힘들지요. 아무리 이맘이라고 하더라도 수니파들에게 자, 미국 놈들 죽이러 가자! 하면 왜? 라고 하지만 시아파 죽이러 가자! 하면 와! 라고 한다는 건 알라무트를 읽고 월드 뉴스를 열심히 본 제 입장에서도 너무 놀라운 사실입니다. 이 놀라움을 글로 전하고 싶은데! 쓰면 조잡해져요! 나는 너무 부족해!

 푸른 옷을 입은 소녀에 대한 감상을 쓰기 위해 나무위키를 열심히 읽었습니다. 이라크내전, 사막의 폭풍 작전, 사담 후세인, 쿠르드족, ISIL, 또 다른 이라크내전 등등을 읽으며 제가 알게 된 모든 것을 줄줄줄 적으려고 했는데 사흘 간 적은 걸 지우고 적은 걸 지우니 그 모든 게 다 부질없는 짓이더라… 라는 뭔가 불교적인 느낌의 깨달음을 얻었지요. 이런 거 몰라도 푸른 옷을 입은 소녀는 재미있는 소설입니다. 기꺼이 추천하고 싶은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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