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슨 도르래 -일본


나도 별들을 바라볼 거야.

별들이 모두 녹슨 도르래를 달고 있는 우물이 될 거야.

별들이 모두 내게 마실 물을 부어줄 거야……. <어린 왕자>

 

 녹슨 도르래는 작가 와카타케 나나미의 대표적인 시리즈 중 하나인 하무라 아키라 시리즈그 일곱 번째 작품(일본 위키에선 어두운 범람을 빼고 여섯 번째로 적혀 있더군요)입니다. 국내에 소개된 하무라 아키라 시리즈는 네 번째 작품인 어두운 범람, 여섯 번째 작품인 조용한 무더위와 이 녹슨 도르래 셋뿐이라 순서가 좀 뜬금없다는 느낌도 들지요. 작가의 작품이 그간 적게 번역된 것도 아닌데 그냥 처음부터 순서대로 내면 안 되나? 싶기도 합니다만 이 시리즈에 대해 검색을 해보니 왜 이런 순서로 국내에 번역되었는지 살짝 감이 왔습니다. 하무라 아키라 시리즈 대망의 첫 작품은 단편집인 선물(プレゼント)’인데 96년에 출간되었습니다. 그 다음 작품인 단편집 의뢰인은 죽었다(依頼人んだ)’00년도 출간이고 첫 장편인 나쁜 토끼(いうさぎ)’01년도 작품입니다. 그 뒤 시간이 흐르고 흘러 13년도에 단편집 어두운 범람(다섯 편 중 2편에 하무라 아키라가 등장)이 나오고 14년에 장편 이별의 수법(さよならの手口)’이 출간되어 약 13년 만에 시리즈가 부활합니다. 출판사 입장에서는 안 그래도 13년간 쿨쿨 자고 있던 시리즈를 위해 24년 가까이 되는 시간을 거슬러 오르기 부담스러웠겠지요. 게다가 시리즈 부활의 신호탄이 된 작품인 이별의 수법은 이미 앞에 네 권 가까운 분량의 이야기를 이끈 주인공이 나오는 장편 소설이니 이걸 처음으로 소개하기도 힘들었을 겁니다. 그러다보니 결과적으로 남은 건 단편인 조용한 무더위가 될 수밖에 없더라, 가 아닐까요? 제 예상에 불과하니 그리 신경 쓰지 마시고중요한 건 조용한 무더위나 어두운 범람부터 읽어도 아무런 무리가 없다는 사실이겠지요.

 

 하무라 아키라 시리즈는 출판사 북폴리오를 통해 2008, 2009년에 1권 네 탓이야, 2권 의뢰인은 죽었다가 출간된 바 있습니다. 지금은 절판이네요. 민망하지만 일단 업로드 직전에 출간 사실을 찾아서 다행이네요.



 

 하무라 아키라 시리즈는 텔레비전 드라마로도 제작된 바가 있습니다. 무려 올해 20201월부터 3월까지 방영된 따끈따끈한 드라마지요. 제목은 하무라 아키라 세계에서 가장 불운한 탐정입니다. 부제 짓는 센스가 끔찍하군요. 절대로 보고 싶지 않은 제목입니다. 이왕 드라마 이야기를 했으니 드라마의 각 화에 해당하는 원작의 제목이나 적고 가겠습니다. 1화는 단편집 선물에 수록된 트러블 메이커’, 2화는 조용한 무더위에 수록된 조용한 무더위, 3화는 의뢰인은 죽었다에 수록된 내 조사에 어림짐작은 없다(わたしの調査手加減はない), 4화 역시 의뢰인은 죽었다에 수록된 짙은 감색의 악마(濃紺悪魔), 5, 6화 그리고 마지막화인 7화는 장편 나쁜 토끼의 이야기입니다. 그나저나 하무라 아키라 역의 주연배우 이름이 시시도 카프카던데부제는 형편없지만 주연배우 이름은 끝내주네요. 내 이름도 카프카였다면삐뚤어졌겠지. 지금 이상으로 쓰레기가 되었을 거야. 끝내주는 이름은 아무나 소화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하무라 아키라, 국적은 일본, 성별은 여자, 기치조지의 주택가에 있는 미스터리 전문서점 살인곰 서점의 아르바이트 점원이자, 이 서점 2층에 사무소를 두고 있는 백곰 탐정사의 탐정이다.(p.7) 탐정으로서의 경력은 길지만 지금은 의뢰인 제로인 상태. 서점도 금토일 밖에 열지 않아서 자금난에 빠졌습니다. 나이도 어느새 40대 중반, 예전처럼 밤을 꼬박 새우는 잠복 조사도 이제는 쉽지 않습니다. 허나 쉽지 않아도 해야 하는 게 일이니 오늘도 하청을 받아 미행을 시작합니다. 미행 대상은 이사와 우메코’. 일흔네 살의 할머니이니 쫓아다니는 건 쉽겠습니다. 의뢰인은 우메코의 아들. 돌아가신 아버지가 남긴 거액의 재산 덕분에 우메코도 아들도 손주도 다들 편하게 살고 있었지만 요즘 들어 우메코의 행적이 심상치 않습니다. 여행도 취소하고 취미도 줄이고 가정부마저 휴가를 보내더니 외출이 잦아졌습니다. 혹시 남자? 재혼은 아들에게 심적으로도 금전적으로도 큰일이니 조사를 맡겼다고 합니다. 우메코의 뒤를 쫓는 하무라. 여기저기 돌아다니던 우메코는 아오누마라고 적힌 우체통이 있는 집 2층으로 향하고 문을 열고 나온 동년배 여인을 향해 미쓰에라 부르며 친한 척을 합니다만 미쓰에의 반응은 탐탁지 않습니다. 거의 막무가내로 집 안에 들어간 우메코. 허나 곧 다시 나와 미쓰에와 드잡이를 합니다. 보아하니 집 안에서부터 이미 싸움이 시작되었고 문 밖으로 쫓겨났는데 붙잡고 늘어져서 같이 나온 셈이 되었습니다. 고성을 지르며 격렬히 싸우는 두 노인. 소란이 커지자 구경꾼인 척 다가가서 싸우는 이유를 들으려는 하무라. 두 노인은 숨막히는 혈전 끝에 결국 서로 뒤엉킨 채 2층 계단에서 굴러 떨어지고 바로 아래에는 하무라가 있습니다!

 

 무섭도록 하드보일드합니다. 이토록 단단하게 익은 이야기는 오랜만이군요. 사소한 악의와 커다란 음모가 파도처럼 쉴 새 없이 몰아치는데 그걸 요령없이 정면으로 일일이 받아내는 하무라 아키라의 모습이 눈물겹습니다. 와카타케 나나미는 일상 속에 녹아있는 악의에 민감하게 반응하여 선명하게 드러내는 능력이 아주 빼어난 작가인데 이런 특유의 날카로움을 클래식 하드보일드에 훌륭하게 녹여냈습니다. 당연하다는 듯 흘러넘치는 편견, 칼날 같은 무신경함, 일상적이라 더욱 눈을 돌리고 싶은 악의가 하무라의 발치에서 질척이고 이걸로도 모자란 건지 비일상적인 거대한 음모마저 그녀를 노립니다. 이 작품의 가장 탁월한 점은 이 모든 문제들은 하무라가 눈을 감고 고개를 돌리면 그녀를 조용히 피해갈 거라는 사실입니다. 하나하나가 하무라를 죽이려고 드는 잔인한 문제들인데 없는 척 무시하면 언제 그랬냐며 스치지도 않은 채 지나가버릴 문제이기도 한 것이지요. 여기서 이 작품의, 그리고 하드보일드의 묘미가 드러납니다. 눈을 돌리지 않는 것입니다.

작가는 한창 여성 탐정이 인기 있을 시기에 의뢰를 받고 하무라 아키라의 이야기를 쓰기 시작합니다. 일본에서 탐정이라는 직업은 리얼리티가 없기에 처음에는 직업이 아예 무직이었다고 하네요. 원래는 단편에 등장하고 끝날 캐릭터였지만 인기가 있어 다른 여주인공들 대신 하무라를 집어넣어 이야기를 하나씩 늘려나갔다고 합니다. 시리즈 첫 단편집에도 하무라가 등장하지 않는 단편이 다수 있다고 하니 와카타케 나나미 월드 내에서의 입지가 꽤나 위태로웠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런 하무라가 이번 작품에서 쉴 새 없이 다치고 구르고 잠도 못 자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작가의 비뚤어진 애정이 느껴지네요.

 이 소설의 흐름은 독특합니다. 하청을 받아서 노인을 미행하다가 다치는데 그 뒤 하무라는 미행 대상 대신 드잡이를 하던 다른 노인과 친분을 맺고 그녀의 삶에 끼어듭니다. 노인의 손자와도 어느 정도 안면을 트지만 딱히 친해지거나 친구가 되지는 않습니다. 그 상태가 유지되던 상황에서 노인과 손자가 퇴장하자 남은 거라곤 대단할 것 없는 약간의 의문과 채 이어지지 않았던 인연 정도밖에 없습니다. 이 과정이 소설의 약 3분의 1 정도 분량입니다. 나머지 3분의 2는 찝찝한 수준으로 남은 의문과 안타까워하기에도 애매한 추억 때문에 죽도록 고생하는 하무라의 이야기로 채워집니다. 남은 등장인물들은 하무라의 행동에 대해 옳다 그르다라는 판단에 앞서 왜? 라는 의문을 가집니다. 심지어 독자들 중에서도 같은 의문을 가질 분들이 계실 겁니다. 왜 하무라는 타버린 잿더미 속에서 홀로 버둥대는가? 이 의문이 소설 녹슨 도르래를 강렬한 하드보일드로 만드는 힘입니다.

 평범한 일상을 미스터리로 담담하게 담아낼 때도 있고 유머러스한 코지 미스터리를 능숙하게 다룰 때도 있는 재능 넘치는 작가 와카타케 나나미가 얼마나 처연하고 냉혹한 이야기를 쓸 수 있는지 확인하고 싶다면 조용한 무더위와 녹슨 도르래를 추천합니다. 일단 조용한 무더위부터 읽고 나서 녹슨 도르래를 읽는 편이 좋다고 생각해요. 기왕이면 어두운 범람까지 먼저 읽으면 더 좋고코로나가 잠잠한 것 같아도 밖에 안 나가는 게 최고니까 집에서 책 읽는 것이야말로 책임감 있는 어른의 자세라 할 수 있지 않겠어요? 저도 좀 방심하고 지냈는데 엊그젠가 대구에서 부산 클럽에 놀러온 애가 확진 판정을 받았고 예상 접촉자가 450여명 가까이 된다는 뉴스에 다시 긴장하고 있습니다. 그나저나 클럽에 450명이나 있었다고? 거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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